참여...(노짱관련)

<진보와 권력②> 대통령비서실과 국정과제위원회 2화

노둣돌 2011. 9. 5. 09:00

 

 

<진보와 권력②> 대통령비서실과 국정과제위원회 2화


 

“나는 책임총리다”…참여정부에 ‘방탄총리’는 없었다

 

- 건국 이래 최초로 일상적 국정운영 위임, 대통령은 국가전략과제 집중

 


 


2003년 2월 27일 참여정부 초대 장관 인선 브리핑.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밝혔다.

“원칙적으로 장관이 권한과 책임을 갖고 일을 해나가기를 바랍니다. ‘수석 시어머니’는 없습니다. 총리가 시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다만 국가전략적 과제라든가 미래 준비와 관련한 특별한 주제는, 대통령이 의욕을 갖고 해나가야 한다고 판단될 때는 바로 개입할 것입니다.”

참여정부는 청와대의 부처 전담 수석제를 폐지하고 참모조직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부처는 장관들이 주도하면서 국무총리와 협의하는 분권형 국정운영을 추구했다. 국무총리 역할이 실질적으로 대폭 강화됐다.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대독(代讀)총리’, ‘방탄총리’는 없었다. 참여정부는 헌법에 규정된 ‘행정각부 통할권’을 실제로 행사하는 ‘책임총리제’를 일관되게 실천했다. 참여정부는 헌법에 맞게 총리제를 운영한 최초의 정부였다.

고건 총리 초대 내각서 임명제청권 실제로 최초 행사

이미 2002년 대선에서 노 대통령은 책임총리제 시행을 약속했었다. 그리고 고건 초대 총리에게 각료 임명제청권해임건의권 등을 보장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겼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제1기 내각을 구성하기 전에 고건 총리와 2차례 이상 공식적으로 협의했다. 대통령 의지에 힘입어 총리도 각료 임명제청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고건 총리는 대통령 대신 인사위원회를 주재하며 농림부 장관으로 청와대가 추천한 민병채 전 양평군수 대신 허상만 순천대 교수를 추천했다. 고건 총리는 건국 이후 장관에 대한 임명제청권을 실제로 행사한 첫 총리가 됐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의 말이다.

“국무총리의 장관 제청권은 헌법에 규정돼있는 것이어서, 말하자면 그런 부분은 대통령이 법을 전공하신 분이라 굉장히 규범주의적인 판단을 갖고 계셨죠. 철저하게 존중하는 편이었죠. 처음부터 고건 총리의 제청권조차도 100% 다 받은 것입니다.”(문재인)

2004년 8월 10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지시는 더 구체화됐다. 각 부처에서 청와대에 보고할 때 해당 보고서를 총리실에도 같이 보내고, 국무회의 운영도 총리 중심으로 하고, 청와대는 대통령 관심사항, 대통령과제 중심으로 업무에 집중해달라는 것이었다. 이해찬 전 총리의 설명이다.

“처음부터 대통령의 뜻이 어떤 것이었냐 하면, 대통령한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데, 대통령 혼자 끌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규모라든가 여러 상황 때문에 지금 내각제로 가기 어려운 나라니까, 분권형 대통령제를 해서, 말하자면 ‘외교․안보와 중요 국정과제는 대통령이 하고 일상적인 정책과제는 총리가 하는 이른바 분권형 제도를 성공시키자’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거든요.”(이해찬)

이러한 역할 분담에 맞게 정책조정회의체계도 자리가 잡혔다.

“월요일 점심에 대통령과 총리가 조율을 해요. 그래서 수요일 국정현안조정회의를 보통 세 건 내지 네 건을 합니다. 그리고 토요일 당·정간에 비공식 8인회의를 하지요. 당하고 조정하는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전날 금요일까지 국무조정실이 차관회의를 합니다. 거기에서 대부분 정리가 되지요. 그 전에 심의관들이 1급 회의를 해요. 그러니까 1급 심의관회의를 하고 차관회의까지 해서 다 조정하고, 안 되는 것은 총리와 대통령이 판단해서 조정해주고, 그리고 당하고 협의하는 거죠. 이렇게 시스템을 짜서 총리실은 정책상황실을 만들었잖아요.”(이해찬)



“어느 총리나 다 힘이 셌다”

이처럼 총리는 매주 수요일 국정현안조정회의를 통해 내각 업무를 조정하고 실질적 내각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총리가 관장하는 국정현안조정회의는 2003년 5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162회에 걸쳐 총 532건의 안건을 논의했다. 특히,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사패산 터널구간 공사, 외국인 고용허가제, NEIS 추진방안, 국민연기금운용체계 개편, 판교 신도시 내 학원단지 조성 등 사회적 갈등과제와 부처간 이견을 조율했다.

과거 정무장관이 맡았던 당․정 협조업무도 국무총리실에서 담당했다. 과거 정부에서는 청와대가 하던 역할을 총리실로 이관한 것이다. 더불어 2004년 5월에 청와대는 정무수석실을 폐지했다. 이는 여야가 원내정당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당·정 분리를 확고히 하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참여정부 총리는 100% 다 자신의 뜻대로 권한을 행사했을까? 김병준 전 정책실장은 이런 질문이 가지는 잘못된 인식을 지적한다.

“만일 총리가 대통령의 정책적인 구상과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했을 경우, 대통령은 이를 시정할 것이며, 이런 일이 두 번만 발생하면 더 이상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을 겁니다. 책임총리제는 총리가 얼마만큼 대통령의 의지와 구상을 제대로 읽고 있느냐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책임총리가 있는 것이지, 대통령의 의지나 큰 국정운영 프레임을 벗어나서 총리가 자기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김병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참여정부의 책임총리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체로 잘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의 의지를 총리에게 전달하는데 청와대 정책실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내부 토론과 조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총리가 권한과 책임을 갖고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 그래도 참여정부 총리 가운데 이해찬 총리가 가장 힘을 셌던 거 아닐까?

“고건 총리 때는 그 체제가 정립이 잘 안 된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국정운영의 기본적인 전체 방향이 다 정리가 안 된 상태였고, 청와대 정책실도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총리도 조심스럽게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로드맵이 정확하게 만들어짐으로써 그 로드맵만 봐도 대통령이나 정부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확실해졌죠. 그리고 이해찬 총리 때부터는 소위 8인회의, 11인회의 같은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정무적인 일만 다루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정책적인 문제도 상당히 다루게 됩니다. 청와대 비서실장, 정책실장, 당 원내총무 등이 다 참석하는데 여기에서 대체적으로 의견을 대부분 조율하기 때문에 총리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 저 양반은 세구나’ 이렇게 보는 것이지, 사실은 어느 총리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김병준)



분권형 국정운영으로 ‘대통령과제’에 집중하다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은 국가전략과제, 총리는 일상적 국정운영을 주도하는 역할분담이 이루어지면서 국정운영의 효율성은 더 높아졌다. 앞서, 참여정부 청와대 조직개편의 핵심이자 시스템 작동의 기본 구조였던 비서실, 정책실 운영사례를 돌아볼 때 책임총리제는 그 같은 운영시스템의 ‘정부 확장판’이다. 일상적인 국정운영을 책임총리와 장관에게 맡기면서 대통령은 지난 수십년간 필요성만 되뇌어져왔을 뿐 역대 어느 정부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묵은 과제, 장기적이고 넓은 시야에서 준비해야 할 국가 차원의 미래 과제 해결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수행해야 할 본연의 과제이기도 했다.



 

 

 



제왕적 총재의 종식, 정당개혁의 막을 올리다

 

- 수평적 당·정 협력과 책임정치 실현 숙제로 남아

 



“대통령이 정당을 좌지우지하지 않는 것이 당·정 분리이며 정당을 좌우하지 않는 저의 무능력, 바로 그게 저의 정당개혁 출발입니다.”

취임 직후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에서 당·정 분리 의지를 밝힌 대목이다. 이처럼 분권과 자율의 철학은 당과 관계에도 적용됐다. 집권당 대표, 사무총장 등에 대한 인사권과 선거 공천권을 좌지우지하며 대통령이 여당을 지배하는 제왕적 총재체제의 종식이기도 했다. 문희상 초대 비서실장의 말이다.

“대통령은 1인 보스체제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에,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해서 ‘이제 내 시대에서 끝내자’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정당의 총재직을 같이 갖고 있으면서 공천권 내지는 당직 임명권까지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고, 그 원칙을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지켰어요.”(문희상)

“대통령이 당 좌지우지, 내 시대에서 끝내자”

이를 통해 여당에서는 상향식 공천 제도와 문화가 자리 잡고 당을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다른 한편으론 정치, 정책현안을 협의하는 다양한 당․정 채널이 마련됐다.

2004년 6월 노 대통령과 당 지도부 회의 이후 당·정·청 지도부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렸고 이해찬 총리의 제안으로 8인회의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회동은 입각 등 외부 요인에 따라 구성원이 달라지면서 8인회의, 11인회의, 12인회의 등으로 진행됐다. 당에서는 의장,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등의 지도부가, 청와대에서는 비서실장, 정책실장,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등이, 정부에서는 총리를 비롯해 당에서 입각한 장관들이 참석했다.

이 같은 과정은 2004년 5월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의 총리 지명 과정을 시작으로, 2006년 1월 정세균 의장의 산업자원부 장관 입각, 유시민 의원의 보건복지부 장관 입각, 2006년 7월 김병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임명 등 인사를 둘러싼 당․정 갈등과 궤를 같이했다. 당․정 협의 활성화과정은 당·정 갈등의 심화과정이기도 했던 셈이다. 갈등의 골은 생산적으로 메워지기보다 ‘봉합’ 수준에 머물렀다.

실제로 2005년 한 해에만 고위 당·정 회의 및 간담회가 43회나 열릴 정도로 역대 어느 정부보다 활발한 당·정 협력이 이루어졌으나 이런 소통이 ‘내실’을 담보하지는 못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청와대와 당 관계가 긴밀하지 않다거나 청와대가 당을 소외시킨다는 비판이 나왔다. 청와대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지적이었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의 말이다.

“그런 비판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아마 과거 정부보다 못한 부분이 있다면 대통령과 당 사람들의 독대가 없어졌다는 것이죠. 그러나 당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자주 했었어요. 총리 쪽에서 매주 금요일 8인회의도 하고요. 중요한 국정 현안을 거기서 다 논의했었죠. 그런데 우리가 당 대표나 지도부한테 늘 협의하고 이야기해줘도 일반 의원들한테까지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일반 의원들의 의견도 수렴되지 않고요. 당 지도부하고 의원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을 뿐이었는데 그런 덤터기를 청와대가 쓴 것 많죠.(문재인)



이정우 전 정책실장의 말도 다르지 않다.

“당과 조율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꽤 노력했는데, 국회의원들이 잘 모릅니다. ‘너무 조율이 없었다. 청와대에서 뭘 하는지 우리는 몰랐다’고 불평을 많이 했는데 실제로 조찬 모임을 국회에 가서 여러 번 했었어요. 12대 국정과제위원회를 전부 국회 상임위하고 1:1로 짝을 지었습니다. 몇 차례 조찬모임을 가졌는데 의원들이 통 참석을 안 해요. 도무지 안 나오더라고요. 그리고는 나중에는 막 비난하더라고요. 조율이 너무 없다, 이러는데 사실은 열성이 너무 없었지요.”(이정우)

이런 양상에 대해 이해찬 전 총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때 당의장 직선제가 되면서, 선거에서 지기만 하면 당의장이 막 교체되는 거예요. 제가 1년 10개월 총리를 했는데, 22개월 동안 당의장이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이었습니다. 4개월, 5개월짜리 당의장이니 사실상 당의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당이 말하자면 아무런 시스템이 없어요. 당․정 협의를 하러 제가 가보니까 자체 안도 없어요. 당 정책기능이 여당이라고 보기에는 아주 취약한 수준이었던 겁니다.”(이해찬)

미완의 당·정 분리, ‘박자’가 잘 맞았더라면…

여당의 취약한 정책기능은 국정책임을 같이하는 당·정 모두에게 적지 않은 한계로 작용했다. 이런 사례는 그 일단이다.

“국가보안법 같은 경우, 개정을 하려고 했잖아요. 그때 대통령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최소한 대체입법을 해서라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이라도 빼야 한다, 그래서 국정원의 수사권을 이번에 빼야 한다…. 그런데 당에서 그것을 안 했어요. 그때 결국 개정을 못했잖아요.”(이해찬)

“저출산․고령화 때문에 복지예산을 늘려야 하는데, 그것을 당이 들고 나오면 자기 성과가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아동세’ ‘저출산세’를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여당 상임위원들을 초청해서 초안까지 거의 만들어서 ‘이것을 당신들이 당에서 들고 나와라, 그러면 우리가 뒷받침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안 했어요. 증세하는 책임을 안 지려고 하는 겁니다. 그때 감세논쟁, 감세하라는 말이 많았어요. 그런데 증세를 안 하는 복지가 어떻게 가능하냔 말이에요. 의원들이 들고 오면 2조원 정도를 배정할 준비는 제가 하고 있었습니다. 들고 나오면 바로 넣어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못하더라고요.”(이해찬)

제왕적 총재의 종식이 남긴 빈자리가 당장 민주적 정당구조와 리더십, 정당 본연의 정책역량 강화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왕’ 중심의 정치 관행과 문화가 해소되고, 정당개혁으로 가는 과정에서 과도기적 한계와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연이은 선거 패배와 대통령 지지도 하락이 겹치면서 노 대통령은 사실상 탈당을 강제 당했고, 열린우리당은 소멸했다. 정책은 당이, 국가는 대통령이 이끌고 간다는 미완성 협주곡, 당·정 분리. 수평적 당·정 협력과 책임정치의 실현이 무거운 과제로 남았다.


 


 

<진보와 권력> ② 대통령비서실과 국정과제위원회


1화 - ‘군림하는 청와대’ 끝내고, 시스템·문화로 ‘2인자’ 없애다



<진보와 권력> ① 참여정부 지도제작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1화 - 대선 나흘 뒤 노무현 당선인 지시 “인수위를 짜시오”
 2화 - 54일간 참여정부 5년의 ‘국정지도’를 만들다
 
3화 - ‘노무현다운 시도’ 미완의 숙제를 남기다
  4화 - 이명박 정부식 조직개편은 인수위 때 ‘부적절’ 결론     
 
5화 - 노무현 대통령 취임, 참여정부 출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