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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질문 2]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진보정권이었나?

노둣돌 2010. 12. 13. 11:06
[노무현의 질문 2]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진보정권이었나?
(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 2010-11-02)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한다. 정통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한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 <진보의 미래 1권> 79쪽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는 진보의 정권이었는가? 제3의 길, 유럽의 진보주의를 기준으로 평가해보자. 그래도 한계는 분명하다. 본시 그들의 좌표는 어디에 있었을까? 과거의 말과 이력을 살펴보자.” - <진보의 미래 1권> 99쪽

<진보의 미래 1권>에서 노무현이 대한민국 전체를 향해 묻고 싶었던 핵심적인 질문의 하나이다. 이 질문 속에는 뚜렷한 기준도 없이 ‘친북좌파 빨갱이’로 불리거나, ‘좌파신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자’로 불리는 언어폭력에 대한 물음이 담겨 있다.

도대체 무엇이 기준일까? 한미 FTA가 신자유주의 정책이라고 한다. 노무현은 동의하지 않았다. 나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위 ‘리얼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은 FTA를 신자유주의 정책이라고 규정한다. 그런 ‘리얼 진보’는 한-EU FTA에는 입 다물고 있다. 그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이론과 사상들이 유럽에서 수입된 것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한국의 ‘참칭 보수’가 ‘친미’이기 때문에 그런가? 그도 아니면 정말로 ‘리얼 진보’들은 ‘반미’이기 때문인가?

이런 나의 물음도 언어폭력이 될 수 있다. 너무 쉽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내 물음은 그냥 되묻는 것일 뿐, 내 생각은 아니다. 노무현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자신들에게는 스스로 ‘리얼 진보’라는 딱지를 붙여놓은 사람들에게 되묻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이 땅의 ‘참칭 보수’(1편에서 리얼 보수는 없다고 규정했기에 참칭 보수라고 명명한 것이다)들은 사대주의의 면면한 피를 물려받았다. 그런 그들에게 미국은 조선시대의 송시열과 그 후예들에게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은혜의 나라, 황제의 나라다. 감히 비판을 하거나 반대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인 것이다. 이것이 친미주의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자 덕목이다.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선물이 있었으니 북한의 존재다. 참칭 보수세력에게 북한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은 악몽이다. 존재기반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북한의 존재는 참으로 감사한 일일 것이다. 이들이 내뱉은 ‘친북 좌파 빨갱이’, 그리고 ‘리얼 진보’에서도 거리낌이 없이 내뱉은 ‘종북주의’는 또 하나의 신성불가침이다. 감히 북한을 이해하려 든다거나, 한반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본다거나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연히 김정일과 식성이라도 같으면 친북좌파가 되는 게 한국이다. 그런 참칭 보수에게 노무현은 명백한 친북좌파 빨갱이일 것이다.

국어사전을 다시 써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참칭 보수’ 뿐만 아니라 ‘리얼 진보’에 의해서 다시 써야 할 듯 하다. 그들의 언어개념은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진보정권이었는가? 아니면 친북좌파 정권이었는가? 그도 아니면 신자유주의 정권이었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노무현의 질문은 우리의 언어 사용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김기원의 답변] 지향성 면에서는 개혁-진보 정권이었다


신자유주의라는 만능 흉기

노무현의 두 번째 질문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진보정권이었나”에 대해서는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가 답변을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성격은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게서는 ‘친북 좌파’라는 딱지를, 진보신당과 민노당 등에 의해서는 ‘신자유주의 우파’라는 딱지를 선물 받았다. 이들에 의하면 한국에서 보수는 한나라당, 진보는 진보신당과 민노당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당과 참여당은 어디에 위치할까? 진보도 아니요, 보수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가를 수 있을까?

김 교수는 우선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진보파의 신자유주의 타령은 우선 그 용어부터 대중을 소외시키고 있다. 쉽게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신’이나 ‘자유’라는 좋은 어감의 말로써 나쁜 대상을 표현하는 건 언어의 정치적 효과에 둔감한 쇠다.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 ‘무분별하고 극단적인’ 규제 완화, 민영화, 대외 개방은 시장만능주의라고 일컫는 게 훨씬 감이 빨리 온다.” - <노무현이 꿈꾼 나라> 40쪽

그러면서 김 교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10년을 시장만능주의라는 단색으로 칠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유럽의 경우 중상주의, 구자유주의, 복지주의, 시장만능주의가 단계적으로 등장했지만, 한국에서는 모든 게 압축적으로 동시에 각축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은 한국일 뿐이다

그렇다. 유럽의 담론은 넉넉하게 잡아도 18세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른다. 300년 가까운 시간을 거치면서 진행된 결과물이다. 그들의 담론은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 유럽의 사상적 흐름을 교조주의적으로 한국에 대입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궁금하다. 이와 관련해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자유방임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 곧바로 국가 주도로, 그것도 거대한 특권 및 특혜의 귄위적 배분을 통한 변칙적-압축적 산업화를 시도했다.” - <노무현 이후-새 시대 플랫폼은 무엇인가> 78쪽

한국은 유럽이 아니다. 미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다. 그냥 한국일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고, 고쳐나가야 할 것, 개선해야 할 것, 없애야 할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외국에서 들여온 이론을 적용할 수는 없다. 아무리 보편적인 사상과 이론이라 하더라도 토대가 다르고, 환경과 여건이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할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 백범일지 나의 소원 중에서

진보와 보수를 서구의 이론을 들이대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 자체가 결여된 사대주의 근성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한국 사회는 소위 <전근대성>의 문제가 아직 산적해 있다. 노무현의 첫 번째 질문에서 엿보았듯이 한국은 소위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다. 특권층과 기득권층이 확장되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각종 특권과 반칙, 불공정, 불공평, 부조리의 문제도 해소하지 못했다.

무슨 ‘주의’니 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의 전근대성은 하찮은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들 대다수는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그것은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꾸준히 베스트셀러로 팔려나가는 현상에서도 알 수 있다.

노무현이 <원칙과 상식>을 떠들고, <반칙과 특권의 철폐>를 목놓아 외친 것은 한국을 들여다본 결과물이지, 서구에서 수입한 이론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일찍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은 좌측으로 한참 달려가면 일본이 보일 겁니다. 일본을 지나서 또 왼쪽으로 한참 달려가면 미국의 사회제도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 죽자사자 또 뛰어가면 저쪽에서 오른쪽으로 막 달려오고 있는 영국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 2004년 5월 27일 연세대 리더십 특강에서


진보와 보수, 개혁과 수구의 기준

이제 김 교수의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김 교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놓고 기준을 설정한다.

“근대 사회에서 진보는 민주주의, 분배, 공평성, 사회연대를, 보수는 시장경쟁, 성장, 효율성, 자기 책임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진보파는 자본에 대한 민주적 규제, 증세와 복지지출 강화, 민영화와 개방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강조하며 보수파는 기업 자유를 위한 규제 완화, 감세와 복지지출 축소, 민영화와 개방 확대를 지지한다.” - 위의 책 40쪽

‘상대적’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이지는 않다. 예를 들어 개방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한미 FTA를 찬성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개방에 대하여 무조건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법률, 금융, 의료, 교육 등 4대 분야에서는 개방에 반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 보수세력의 중추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4대 직역의 경우 개방으로 인해 자기 직역의 이익이 침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해관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개방에 찬성한다고 보수, 반대한다고 진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하다.

민영화와 효율성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민영화는 해야 한다. 진보진영에서는 거의 교조적으로 민영화 반대를 내세우지만, 실상 방만한 경영과 터무니없는 보상체계를 갖고 있는 공기업의 경우, 노조의 민영화 반대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많은 것들은 실상 기준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현실을 보면, 민영화라는 말만 나와도 진보진영은 경기를 일으킨다.

그래서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진보파와 보수파 내에는 개혁과 수구가 존재한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 위의 책 40쪽

그렇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공기업과 대기업 노조다. 민주노총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이들은 80년대 후반 노동자 대투쟁 이후 형성된 높은 임금을 비정규직과 나누지 않는다. 사회적 연대에도 별 관심이 없다.

김 교수는 <진보와 보수>를 가른 뒤에 이를 다시 <개혁과 수구>로 나눈다. 그러면 4개의 조합이 나올 수 있다. 개혁진보, 수구진보, 개혁보수, 수구보수로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분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회과학이 과연 과학인지도 의심하는 입장이다. 더 나아가 과학이나 수학적 방식으로 세상을 분류하고, 사람을 분류하고, 무슨 이론체계를 만드는 것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어떻든 김 교수는 이런 기준을 토대로 이렇게 말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개혁적 성향에 대해선 대부분이 수긍하지만 진보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그리고 남북한 화해 정책이나 과거사 바로잡기 등에서의 진보성은 인정하나 경제정책에 대해선 사정이 다르다.” - 위의 책 42쪽

결국 경제정책을 기준으로 진보인가 아닌가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지향성 면에서는 개혁-진보정권

김 교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10년 동안 추진한 정책은 중상주의적 개발독재, 구자유주의, 복지주의, 시장만능주의가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는 서구처럼 단계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우 압축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97년 외환위기의 파급효과가 미친 영향도 적지 않다. 더구나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모두 소수 정권이었다.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이 주는 제약도 크다.

그래서 김 교수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지향성 면에서 본다면, 두 정권은 여건과 역량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는 공정한 시장 경쟁을 위한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고,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려는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요컨대 지향성 면에서는 개혁-진보 정권인 셈이다. 하지만 정책 실행에서는 개혁이 불철저했고 진보성도 강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게다가 시장의 활성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과도해져 시장만능주의 정책이 취해지기도 했다.” - 위의 책 50쪽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평가에 동의한다. 다만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는 별개다.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걸 바꿀 수는 없다. 이것이 김대중-노무현이라는 두 명의 대통령을 변명하는 것으로 들릴지 몰라도 엄연한 현실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들의 생각만큼 변화한다. 그리고 국민의 생각은 소수의 엘리트 머릿속에 있지 않다. 현실에 있다. 정치인들도 그렇고, 특히 ‘리얼 진보’도 그렇지만, 자신들의 생각이 마치 국민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 착각이다. 더 나아가 오만이고 교만이다. 현실에 불철저한 관념적 사변이다.

국민들의 생각은 여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여론은 압도적으로 보수 일색이다. ‘리얼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권만 잡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 소망대로 할려면 독재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리얼 진보’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역량과 조건을 뛰어넘는 주장은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다. 우리가 가진 역량과 주어진 조건에서 실현 가능한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진짜 진보’다. 현실화할 수 없는 상상이나 망상 속의 진보야말로 ‘거짓 진보’가 아닐까?

김 교수는 노무현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런 말로 끝낸다. 나도 동의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개혁성과 진보성은 그들 이후 이명박 정권의 수구성과 보수성 속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허나 단순히 두 정권에 대한 추억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충분히 실천에 옮기지는 못한 개혁성과 진보성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게 개혁진보 진영의 과제다. 그러려면 두 정권의 제약 조건과 주체적 역량 부족에 대한 엄밀한 검토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위의 책 51쪽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무엇을 무기로 치를 것인가? 오바마의 카피를 표절한 정동영의 ‘담대한 진보’로? ‘역동적 복지’로?

내가 아는 범위에서 <노무현 이후>를 모색하고 준비하고 있는 지식인은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이 단연 뛰어나다. 다음 글에서는 김 소장의 주장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해서도 다양한 주장의 토론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스나이퍼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fp_forum&uid=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