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질문 7] 민주주의와 진보는 어떤 관계인가?
(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 2010-11-10)
“진보는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가치다. 민주주의는 지금도 진보의 도정에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라야 진정한 민주주의다.” - <진보의 미래> 77~78쪽
“내가 말하는 시민이라는 것은 자기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 자기와 정치, 자기와 권력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적어도 자기의 몫을 주장할 줄 알고 자기 몫을 넘어서 내 이웃과 정치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일반화해서 정치적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시민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 시민 없이는 민주주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시민의 숫자가 적다면 시민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죠. 시민의 범위를 넓혀 나가는 것이 진보주의, 시민의 범위를 넓혀 나가는 과정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진보의 미래> 295쪽
일곱 번째 답변자로는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이 나섰다. 참여정부에서 3년간 언론정책을 담당하면서 취재선진화 방안을 추진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대통령님 살아생전 <진보의 미래> 집필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멤버이기도 하다.
[김창호의 답변] 민주주의의 재민주화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상식 수준의 생각이고, 상식에 맞지 않는 생각도 존재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현재의 상황을 민주주의 후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간과한 노무현과 이명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른바 ‘노명박’을 주장하는 최장집과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 등 소위 ‘리얼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제도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징후는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미네르바 사태에서부터 노무현 대통령님이 서거에 이르는 과정이 그렇고, 최근의 G-20을 앞두고 시민의 자유권을 광범위하게 제한하는 조치가 그렇다. 툭하면 ‘빨갱이’를 앞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가 전혀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북한에 반대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이고, ‘북한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반대하는 것은 친북좌파 빨갱이’라는 등식이 자유민주주의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대통령은 나라님이고 그 부인은 국모지만, 이것 역시 그들이 내세운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공식일 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김정일 2중대가 되는 세상이다.
학자들은 보편성과 객관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쉽게 말해서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비합리성, 특권의 존재다. 우리나라의 과거는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다. 그 시대에 쌓인 문화가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쉰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는 ‘주어진 것’이다. 우리 스스로 발전시킨 것이 아니다. 주어진 민주주의를 현실에 맞추기 위해 4.19혁명이 일어나고, 전태일이 분신하고,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이, 그리고 6.10항쟁이 일어났다. 가깝게는 다수결을 이용한 탄핵추진에 맞선 촛불집회와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확대에 맞선 촛불집회가 일어난 것이다. 유시민 말대로 ‘후불로 치르고 있는 것’이다. 김 처장은 강정인 교수의 <민주주의의 한국적 수용>을 빌려 한국의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베링턴 무어)는 말처럼 유럽의 민주화는 사회 계급적으로 부르주아의 성숙한 발전을 거쳐 이루어졌다. 반면 우리의 경우 외부에서 ‘빌려온 정당성’의 힘으로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해 왔을 뿐 우리 공동체 내부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했다……. (중략)…… ‘인민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외면되고 ‘입헌 절차’와 ‘공직 선거’ 정도로 축소된 일종의 정치 과정으로 ‘보수화된 민주주의’가 돼버렸다.” - <노무현이 꿈꾼 나라> 121쪽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가 주도권을 잡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반공=자유민주주의’가 된 것이다. 그 결과 자유는 질식당하고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4.19 이래로 끊임없는 시민들의 저항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반공=자유민주주의’라는 등식은 여전히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 역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김 처장은 이처럼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체시키고 있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대해 이같이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과거의 퇴행적 이념들과 동시적 형태로 결합돼 나타남으로써 오늘날 우리 민주주의의 허약성과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우리 역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던 권위주의적 보수 권력들이 만들어 낸 독특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 위의 책 122쪽 스스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주어진 민주주의 그리고 냉전으로 탄생한 반공이데올로기, 여기에 지역주의까지 더해지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껍데기를 유지하기도 힘들어지는 것이다. 투표행위는 그야말로 임금과 왕, 그리고 귀족을 뽑는 절차로 통용되고 있다. 반공이데올로기는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근대 헌법을 가진 국가라면 너무도 당연히 보장되는 온갖 자유를 억압하고, 지역주의는 정당민주주의를 무력화하여 대의제 위기로 치닫게 만든다. 결국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했지만 간단하게 축약하면 이렇게 된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먼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에 대한 김 처장의 생각을 들어보자. “근대 민주주의는 대의제의 발달, 공화주의의 전통, 평등에 대한 신념 등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 위의 책 123쪽 김 처장의 말대로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는 대의제, 공화주의, 평등이라는 요소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한국 사회에서의 대의제는 나라님을 뽑는 절차로 전락했고, 공화주의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조선시대 양반의 전통을 이어받아 반칙과 특권을 일삼는 세력이 아직도 건재하다. 평등은 까마득한 과제가 되어버렸다. 대의제의 위기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김 처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의 다원화-다변화에 따라 이익집단, 시민사회, 개인화된 네트워크 등 다른 영역의 역할이 커지는 반면, 정당이라는 전통적인 조직 양식이 점차 그 지배적 영향력을 잃어 가고 있는 현상 속에서 대의제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 위의 책 126쪽 단순히 다른 영역의 역할이 커지고, 그 비례하는 만큼 정당이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어서 대의제가 위기일까? 시민결사체의 결정체가 바로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은 시민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신뢰의 상실이라고 해야 옳다. 한국의 정당이 시민들의 불신을 받게 된 이유는 정말 많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거의 혈혈단신으로 대통령이 된 이유를 뒤집으면 알 수 있다. 결국 시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정당시스템이 정당의 본래 역할을 축소시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김 처장도 이같은 내용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김 처장은 이렇게 말한다. “대의제 위기에 대한 대중들의 폭발적 저항은 직접민주주의 형식을 요구하고, 그 공간이 바로 광장이다. 그것이 사이버 공간이든, 물리적 공간이든 마찬가지이다……. (중략)…… 이러한 광장의 정치적, 소통적 역할이 강조되는 것은 그만큼 의회 정치, 대의제의 위기가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촛불시위는 시민과 대의제 속에 숨어 특권적 이익을 추구하는 낡은 정치 세력과의 직접적 대립의 한 형태이다.” - 위의 책 127쪽
대의제가 위기를 겪고 있는 것만큼이나 공공성도 위협을 받고 있다. 근대시민국가가 언론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언론의 공공성 때문이다. 미국의 건국 헌법에 참여한 제퍼슨이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하겠다”고 말한 것도 언론의 공공성 때문이다. 언론은 사회의 다양한 생각을 전달하여 여론을 모으고, 공론을 형성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언론은 그 자체가 권력이 되어 버렸다. 그 어떤 민주적 정당성도 없다. 통제도 받지 않는다. 기껏해야 공정거래법으로 자전거와 비데를 막았지만 이마저도 무력화되었다. 공공성 때문에 자유를 보장받았던 언론은 이제 기업활동의 자유를 외치고 있다. 기자는 회사원이 되었고, 자유를 위해 권력과 싸웠던 지식인 사회는 이제 돈을 위해 재벌의 전위대를 자처하고 있다. 사적인 이익은 공공성을 압도하고 있다. 그 반대편의 노동조합, 특히 대기업과 공기업 노동조합은 이미 확보한 막대한 기득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들에게도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보다는 사적 이익이 앞서고 있다. 김 처장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우리 사회는 IMF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공공적 가치보다 생존을 위한 경쟁이 더욱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됐다. 시장 권력은 ‘이익 추구’라는 가치를 무한대로 확장해 나가고, 공공적 가치가 시장의 이익으로 해체되면서 ‘인민의 지배’라는 원칙과 함께 또 다른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공공적 가치’가 각자의 이익으로 분해되고 있다.” - 위의 책 128쪽 결국 이 같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재민주화’가 필요하다고 김 처장은 역설한다. 즉 새로운 민주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민주주의의 재민주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 그리고 언론의 정파성 등과 같은 조건을 넘어 어떻게 다수의 사람들이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정치 행위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중략)…… 오늘날 대의제 위기와 관련해,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가 대중들의 자발성과 어떻게 연결되느냐, 그것도 광장이라는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제도적으로 연대 고리를 확보하느냐라는 점이다.” - 위의 책 131쪽 김 처장의 결론은 ‘정당의 민주화’로 말할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결국 다양한 시민들의 이익과 가치를 하나로 집결시키고, 이를 통해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는 정당이 시민들과 잘 연결될 때 대의제 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 이 같은 논지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대의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뢰 상실’이라고 보는 내 입장에서는 현 정당들은 신뢰부터 회복하거나, 쌓아나가는 일을 해야 한다고 본다. 정당도 시민들의 결사체다. 국민참여당이 그런 생각을 토대로 만든 정당이고, 노동자와 농민을 기반으로 한 민주노동당도 그렇다. 그러나 시민 결사체로서 정당은 시민들의 신뢰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그래야 대의제 위기는 극복되고,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노무현 대통령의 질문은 “민주주의와 진보는 어떤 관계인가?”이다. 여기에 대해 김 처장은 “위기를 겪고 있는 민주주의의 재민주화가 필요하다”고 답하고 있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이 진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대통령의 질문에 이미 답이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왜 그런 답을 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김 처장의 답변을 참조할 때 그 내용이 더욱 풍성해진다고 믿는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시민이다. 시민은 그냥 개인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다. 나의 이익을 넘어서 이웃의 이익, 그리고 공동체의 이익까지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시민이다. 이런 시민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 자체가 진보라고 대통령은 말한다. 자신이 이해하고 경험한 이 세상을 이웃과 함께 이야기하고, ‘공감’을 넓혀나가는 것이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공감’을 넓혀나가기 위해서는 ‘신뢰’가 확보되어야 한다. 한국의 진보 진영은 당위적으로 옳은 주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폭넓은 공감은 얻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민주당의 지지율은 오르지 않는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조차 외면하는 정당이다. 진보신당은 존재의미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시민들의 결사체에 가장 가까운 국민참여당이 왜 시민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가?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진보의 미래>라는 게시판에서, 폭넓은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없이, 조금은 외로움과 싸우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뢰의 상실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결국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신뢰를 얻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개인이든, 여러 사람이 모인 결사체든, 그 이치는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스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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