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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事] 내 친구 노무현 죽음까지... ③ 제3회 조선일보 횡포

노둣돌 2011. 5. 30. 11:16

 

 

秘事

 

내 친구 노무현 죽음까지... (함께한 40년 눈물로 쓴다. 제3회 조선일보 횡포)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산상업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졸업 후 삼해공업(주)회사에 같이 입사하여 근무하였다. 그 후 노 대통령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를 거쳐 부산에서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하였다. 나는 노 대통령의 학창시절은 물론 인권운동을 할 때도 함께 했으며 초선시절 민주당 동구지구당 수석부위원장, 종로지구당 수석부위원장, (주)오아시스워터, (주)장수천 감사 등으로 활약하며 노 대통령 곁을 쭉 지켜왔다.

  당선 이후 여러 언론의 접근도 많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한 번도 인터뷰에 임한 적이 없었다. 퇴임 후 같이 살자는 노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며 묵묵히 일상생활을 열심히 해 왔다. 이제 고인이 된 노 대통령이 새삼 그립기도 하고, 또 진영신문이 개간하면서 노 대통령의 추억담을 요청해와 처음으로 기억을 더듬어 노 대통령과의 과거를 회고해 본다. 진영신문 박원철 대표는 노사모 회원으로 많은 활동을 해왔다. 그 노고에 달리 보답할 길도 없고 하여 나의 추억담이라도 선물하려 한다.

  

  지금까지 언론에 나온 통상적인 얘기들은 생략하고 히든스토리 위주로 꾸며볼까 한다.

 

 


보수언론 기자의 교활함

 

  이즈음 조선일보에서는 노 대통령을 고졸출신이라고 업신여기고 국회의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증스러운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간조선에서는 표지모델로 노 대통령을 내놓고 “노무현 의원 그는 상당한 재력가인가?” 라고 포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노사문제에 개입하여 노측에도, 사측에도 돈을 받아 축재했다.” 고 쓰고 있었다.

 

  기사가 나오기 전, 주간조선 우종찬 기자는 노 대통령을 찾아와 취재하였다. 노 대통령께서 친절히 있는 그대로 대답하셨다. 레저용 요트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며, 기자가 질문하는 형님의 밭떼기 얘기며, 노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재산 얘기며 실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그런데 우종찬 기자가 기사를 낼 때는 마치 노 대통령께서 호화 요트를 타고 다니는 것 같이 기사를 썼다. 형님의 밭떼기 얘기도 기자가 물어서 애초에 몇 마지기 사서 갖고 있다가 몇 마지기 팔고 현재 조금 가지고 있다고 친절하게 대답했는데, 마치 그것을 노 대통령이 팔고 사고했으며, 또한 판 것까지 모조리 합해서 현재 노 대통령이 밭을 소유하고 있는 양 대서특필 했다.

 언론의 속성상 한번 나가면 끝이였다. 고스란히 덮어 쓸 수 밖에 없었다.

 


판사 - 안줏감으로 질근질근 씹었군요.

 

  고민 끝에 선일보를 상대로 소송 하기로 했다. 서울 민사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법원에 증인으로 나(정인석)하고 동기생(하구락)이 나갔다.

 

판사 - 그 기사가 노무현 의원에게 영향을 미친 사례를 말해보세요.

증인 - 부산 시내 술집이며, 포장마차며, 저녁에 나가면 그 기사가 화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노무현이 재벌 못지않은 재산가라고 목청을 돋우기도 합니다.

판사 - 안줏감으로 질근질근 씹었군요......

 

 재판에서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었다. 판결문에는 안병훈 편집장과 우종찬 기자가 사실을 외면하고 소문에 기초해서 부풀려 기사를 썼다고 적시하고 있다. 애초에 대서특필했던 조선일보는 ‘재판에서 노무현이 이겼다.’ 라는 기사를 모퉁이에 보일 듯 말듯 실었다.

 

  그 후에도 조선일보는 노 대통령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현대중공업사건도 실은 이렇다. “사실 내가 힘이 없소, 국회에 노동자들을 위한 의원 열 명 정도만 있어도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어떻게 해볼 수도 있는데 참 딱하군요.” 이 말을 “국회에서 마음 맞는 의원 20명 정도 모아서 확 판을 쓸어 엎어 버리겠다.” 라는 말로 왜곡 보도했다.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의 집단인 조선일보는 이때 벌써 ‘한국에 진보세력이 집권할 수도 있다.’ 라는 예측을 한 것 같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급하게 변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입지가 확대되어가고 있었으며, 사업장에서는 그동안에 억울하게 당했던 노동자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최초의 지방선거 실시

 

  90년도에 최초의 지방선거가 시작됐다.

동구에는 광역의원구역으로 3구역이 있었다. 민정당 쪽에는 “공천비용이 20억이다.” 라는 말이 있어도 서로 공천을 받으려고 줄을 섰고, 민주당 쪽은 어느 누구도 나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문기자들은 취재차 계속 사무실을 드나들며 광역공천자가 누구냐고 묻곤 했다. 마감일이 다 되어가는 데도 선거 나갈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명색이 현역의원 지역에 공천자가 없다니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3구역(수정, 좌천, 범일)에 내 사진이라도 기사로 나가게 했다.

  등록마감일이 되었다.

부랴부랴 1, 2구역에는 보수성향의 사람이라도 공천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구역에는 내가 나가게 되었다. 부산지역에서는 민주당 간판 달고 나가봐야 되지 않을게 뻔한 일이었다. 그래도 현역의원지역의 체면을 걸고 공천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뻔했다. 모두 낙선이었다. 그러나 그 뻔한 선거에서도 노 대통령의 애착은 남달랐다.

  선거기간 동안 새벽에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핸드마이크를 잡고 골목골목을 누볐다. 마지막 날엔 목이 메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데도 해가 질 때까지 마이크를 잡고 안창 골목길을 누볐다. 그 뒤에 목에 피가 올라오고 심한 몸살이 나서 나는 대연동의 한약방에 가서 한약을 지어오기도 했다.

  내가 사무실 책임을 진 이상 노 대통령이 내려오면 이런저런 보고를 했다. 워낙 바빠서 보고는 차 속에서 이루어졌다. 김해공항에 내리면 내가 차를 몰고 가서 모시고 오면서 작성한 보고서를 보여주고 약간의 설명 덧붙이곤 했다.

  사실 부산지역에서 노 대통령 혼자 현역이라 시 지부 업무도 실은 노 대통령이 맡아서 했다. 그때 당시 부산의 민주당 위원장 중에는 실로 가관인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대통령은 그 사람들을 버리지 않고 같이 일해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3당 합당! 그리고 비정한 정치판

 

  1990년, 3당 합당이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이를 통렬히 비난하며 합당을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에 남아서 정치를 계속했다. 그때 무척 어려웠다. 영남지역 일부에서는 김영삼을 배신했다는 논리로 공격을 해왔다. 우리측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아닌 논리지만 영남지역의 대다수 유권자에게는 이 논리가 먹혀 들어갔다. 심지어는 형 노건평씨까지 이와 같은 이유로 대통령과 논쟁을 일삼았다.

  그때 당시 지구당 운영비는 바닥이 났고, 후원도 거의 끊긴 상태였다. 이호철, 이광재 비서는 살길을 찾아 나갔고, 안희정 비서만 남아서 업무 계속 보았다. 사무실 운영비라도 마련해 볼 요량으로 몇몇 뜻이 맞는 의원들은 강남에 ‘화로동선(火爐冬扇)’이란 고깃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사회경험이 없고 의욕만 앞선 경영이었다. 한국의 조세 풍토상 매출을 100% 노출시키면 가게운영이 안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젊고 패기에 찬 의원들은 매출을 100% 노출할 것을 주장했다. 예상대로 가게는 몇 개월 못 버티고 본전을 다 까먹고 막을 내렸다.

 

 


하룻밤새 맘 변한 이기택 총재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이기택 총재와 다 합의가 되어서 구로(을) 보선에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일이 후보신청 마지막 날이니 부산에서 노 대통령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떼 가지고 내일 아침 급히 서울로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부랴부랴 부산상고에 가서 증명서를 떼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밤사이에 이 총재가 다른 사람으로 후보를 교체하고 말았다. 아마 이러한 일들도 대통령에겐 전화위복의 사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91년, 신민당, 민주당 야당통합이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통합협상대표로 활약하며 야당통합을 이루어 냈다.

그 후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귀인을 만나다.

 

  이 시절 어려울 때 대통령을 도와준 한 분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름은 조종성 회장이다. 조종성 회장은 올해 71세로 (사)팍스코리아나-이사장, 한국 궁도협회 회장으로 있다. 당시 우리 동기 故유순철의 소개로 JC 특우회를 같이하는 연유로 노 대통령과 만나게 되었다.

 

  노 대통령는 부산이 연고이고, 또한 학교도 부산상고가 최종학력이라 서울에는 연고가 거의 없었다. 반면 조 회장은 서울이 고향이고, 서울에서 여러 활동을 많이 하셔 서울에 발이 넓었다. 조 회장은 민주당 문희상 의원과 각별한 사이라 노 대통령을 소개시키면서 서로 더욱 친분을 쌓게 되었고, 재임시절 비서실장으로 중용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조 회장은 초선 대통령과 한동안 활동을 함께하며 많은 인맥을 만들어 주셨다. 그런 일들이 거름이 되어 노 대통령은 통합민주당에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기까지 많은 도움이 되었다. 회식이 있는 날이면 노 대통령은 못 마시는 술에 취해서 압구정동 조 회장 집에서 자고 간적도 몇 번 있었다. 가끔씩 노 대통령 용돈이 떨어질 때쯤 되면 조 회장은 지인들을 식당으로 불러 같이 식사를 하면서 십시일반으로 봉투를 만들어서 용돈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국수먹으며 의정활동

 

  이즈음 이광재, 서갑원 비서는 생활비라도 벌어 보려고 종로통에서 ‘꼬추친구와 불알동무’ 란 조그만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리저리 정치판에서 몸부림치고 비서는 안희정 혼자만 남고 모두 생활비를 구하러 쫓아다니는 형국이었다.

  인고의 세월은 짧은 것 같지만, 우리에게는 긴 세월이었다.

 

우리는 초량 3동으로 사무실을 옮겨서 생활밀착형 의정활동을 전개했다. 지구동 소식지도 내고, 사무실에서 손숙 선생을 초대해서 여성교양강좌를 열기도 하고, 거창에서 유기농 감자, 감나무 밭을 같이 가꾸기도 하였다. 또한 사무실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무공해 비누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절이 노 대통령이 가장 알찬 지역주민을 위한 의정 활동을 한때라고 생각된다.

 

 


제14대 총선

 

  1992년, 드디어 제14대 총선의 막이 올랐다.

우리 사무실은 달세도 비싸고 해서 본 도로에서 한참 위로 붙은 사무실을 구했다. 돈이 없어서 밀려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동운동이 사회에 거세게 밀어닥쳤다. 택시노조파업, 부두노동자파업, 노 후보가 노동자를 아끼는 사람이니까 부산의 파업단체는 거의 우리 사무실을 점거했다. 한쪽에서는 선거운동원들이 차지하고 한쪽에서는 파업노동자들이 차지하고 말 그대로 사무실이 쑥대기판이었다.

 

 


-정인석 약력-

*부산상업고등학교(53회) 졸업

*연세대학교 법무대학원(19기) 수료

*민주당 부산동구지구당 수석부위원장(위원장 노무현)

*민주당 서울종로지구당 수석부위원장(위원장 노무현)

*변호사 노무현사무소 사무장(서울변협)

*개혁국민정당 부산위원회 운영위원장

*열린우리당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

*(주)장수천 감사


 daum카페 명: 노무현-노공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