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노짱관련)

-<진보와 권력②> 대통령비서실과 국정과제위원회 1화

노둣돌 2011. 8. 23. 09:24

 

 

 

<진보와 권력②> 대통령비서실과 국정과제위원회 1화


 

‘군림하는 청와대’ 끝내고, 시스템·문화로 ‘2인자’ 없애다

 

- 비서실과 정책실 분리, 부처 담당 수석제 폐지…견제와 균형, ‘통합적 관리’ 중시

 


1987년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적이고 탈권위주의적 문화가 확대되어 왔다. 또한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중앙집권적 체제에서 분권과 자율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질서가 요구됐다. 대통령후보 시절부터 이미 분권과 자율의 철학을 대내외에 천명했던 터. 이 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던진 화두가 바로 ‘시스템’이었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설명이다.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정부를 운영하는데 법가(法家)적 사고를 가지고 계세요. 때문에 제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제도의 중요성을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사람이 선하게 살 수도, 악하게 살 수도 있다’고 볼 정도로 시스템과 제도를 굉장히 중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한을 많이 준다 하더라도 그 권한이 독자적으로 마음대로 행사되도록 두는 법은 없어요. 반드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하지.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오류의 가능성을 시스템으로 제어하려는 것이지요.”(김병준)

“1인 보스체제 없다” 확고한 분권 의지…청와대부터 혁신

시스템을 통한 업무 수행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통령비서실(청와대) 조직과 운영부터 그에 맞게 혁신할 필요가 있었다. 참여정부 청와대는 2실장(비서실장, 정책실장), 5수석(정무, 민정, 홍보, 국민참여, 정책기획), 6보좌관(국가안보, 경제, 외교, 국방, 정보과학기술, 인사) 체제로 출범했다. ‘부처별 담당 수석비서관 체제’ 폐지, 정책실 신설로 국정운영의 첫 발을 뗀 것이다. 문재인, 문희상 전 비서실장의 말이다.

“그 당시 우리가 공감했던 것은 앞의 정부 때까지 각 부처를 담당하는 수석들이 부처 위에 군림하는 역할을 해서 청와대가 대단히 권위주의적인 체제였는데 이제는 수석들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 다들 공감했죠.”(문재인)

“대통령 뜻은 1인 보스체제를 없애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장관급이 셋이 된 겁니다. 비서실장은 총괄만 하고, 정책실장과 장관급 안보보좌관직을 만든 겁니다. 대통령비서실 권한을 셋으로 쪼갠 것인데, 전엔 없었던 일이죠. 담당 수석이 있으면 장관 위에 옥상옥이 돼 1인 보스체제를 강화합니다. 전 부처가 대통령비서실 소속이 되는 거죠. 그러면 장관이 무엇을 결정하려 해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대통령이 그런 것을 원치 않았어요.”(문희상)

청와대 개편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정무기능을 주도할 비서실장과 정책파트를 총괄할 정책실장의 쌍두체제였다. 처음엔 정책실을 비서실과 완전히 분리시켜 별도로 구성하려 했으나, 정부조직법 14조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당시 여소야대 구도 속에서는 난망한 일이라고 봤다. 법 개정 없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한 끝에 비서실 체계 속에 정책실을 신설하고 실질적인 운영은 분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책실은 종전처럼 부처를 나눠 관리하는 업무관장을 피하고, 12대 국정과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정책실이 국가 차원의 큰 기획과 청와대 내의 조율을 담당하고 또 그것을 총리를 포함한 내각에 확실히 전달함으로써 내각이 자신 있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지요. 큰 틀의 그림을 주고 청와대 정책실은 제대로 집행되는지 점검하고, 부처 간에 발생한 이해관계가 총리 차원에서 해결이 안 되면 그때 청와대가 개입해서 조율하는 시스템으로 구상한 것입니다. 내각에게 자신 있게 행정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정책부분의 강화 또 조율기능의 강화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김병준)



“보고 받지 말라는데 왜 자꾸 받나!” 시행착오와 혼선도

물론 이 같은 취지가 순탄하게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시스템이 ‘에러’ 없이 작동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문화로 정착되기까지 착오도, 혼선도 있었다. 부처에서는 그래도 청와대 보고가 먼저였다. 초기 청와대 정책실은 기획조정·정책상황·정책관리비서관실 등으로 구성됐다. 예전에는 건설교통비서관실, 금융비서관실 등등 ‘간판’만 봐도 알 수 있었는데 보고할 길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데가 ‘정책상황’이었다. 정책상황비서관실에 온갖 부처 보고가 몰렸다. 정책상황비서관실 인원이 늘어갔다. 이 얘기를 들은 노 대통령은 화를 냈다. “일일이 보고하지 말라고 조직을 작게 만든 것 아니냐. 그런데 왜 자꾸 보고받는 것이냐. 보고를 받으니까 자꾸 부처에서 오는 것 아니냐”는 질책이 이어졌다. 난감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보고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계속 옵니다….”

“부처가 전혀 적응할 태세가 안 되어 있었던 거죠.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결정해서 당신이 다 알아서 하라, 당신이 책임져라’ 하는데 절대 그렇게 안 하거든요. 청와대에 일단 보고는 했다고 하는 메모라도 남겨놓지요.”(김병준)

이러한 초기 혼란으로 정부가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경우가 화물연대 사태였다. 화물에 관한 사안은 건교부, 질서유지는 행자부, 파업은 노동부, 불공정계약이라는 파업원인은 공정거래위 소관…. 이 같은 상황에서 청와대, 총리실, 각 부처 간의 통합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국무회의에서 부처들도 ‘이런 사태가 터졌다’는 수준의 보고만 이루어졌을 뿐 명확히 자기 소관이라고 하는 곳이 없었다. 급기야 노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물류사태로 도시 하나가 마비됐는데 어떻게 대책을 보고하는 장관이 없습니까!”

“청와대가 총리실에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총리실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던 겁니다. 관료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데 책임지기 싫어하고, 그런 와중에 부처 간에 조정과 협력이 제대로 안 됐고요. 시스템에 따라 일 처리를 해본 적도 없었고, 문화도 안 갖춰졌던 것이죠.”(김병준)

이 사건으로 한동안 기획기능은 국정과제위원회에서, 정책현안은 청와대 정책실에서 나눠맡았다. 이후에도 정책실과 정책기획위원회를 중심으로 상황에 따라 기획과 현안 업무는 통합되기도, 분리되기도 했다. 청와대는 출범 당시 신설한 업무프로세스개선(PPR: Policy Process Reengineering)비서관실을 중심으로 수시로 조직문제를 진단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실제 운영에 있어서도 공개적인 회의와 토론을 통한 의사결정으로 시스템 안착을 지원했다.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회의, 비서실장 주재 수석·보좌관회의, 일일상황점검회의, PI(President Identity)회의, 정무관계수석회의 등 5개 주요 의사결정회의를 비롯해 50여개의 회의체가 운영됐다. 이를 통해 대통령과 일부 핵심측근이 정책을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와 토론으로 의제를 발굴하고 관리했다.



밀실 독대 사라진 자리는 공개적인 회의와 토론으로 채워

공개적인 회의와 토론은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담보한다. 노 대통령은 회의뿐만 아니라 부처의 개별 보고 시에도 반드시 관계 수석, 비서관, 실무행정관까지 배석시켰다. 행정관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보고에 배석한다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행정관까지 배석시키는 상황이니 자연히 독대는 사라졌다. 먼저 이해찬 전 총리의 말.

“대개 주말에는 관저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성격이 최소한도 기록관은 있어야 돼요. 독대는 절대로 안 해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니까.”(이해찬)

“집안사람을 만난다거나 하는 자리 외에 하다못해 학교동문을 만나는 자리에도 배석을 시켰죠. 적임자가 있으면 그 적임자로 하여금 배석하게 하거나, 없으면 비서실장이 와서 배석하고요.”(문재인)

청와대 조직의 상시적인 조직진단과 개편, 공개적인 회의와 토론을 통한 투명한 의사결정. 새로운 시스템과 문화의 정착이 이렇게 함께 갔다. 이후에도 인사보좌관을 인사수석비서관으로,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경제정책수석비서관으로 바꾸고,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을 신설하는 한편 하부조직에 대한 개편이 이어졌지만, 2실장 체제의 기본골격은 계속 유지됐다. 2006년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위기관리센터를 제외하고 비서실로 편입됨에 따라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을 포함, 3실장 체제가 됐다.

정책실 산하 경제정책수석, 사회정책수석 역시 과거와 같은 개별 부처 담당 수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용익 전 사회정책수석의 말이다.

“(대통령은) 참여정부 이전 정부나 이후 정부의 청와대보다 통합성을 더 중시하셨던 것 같아요. 사회수석으로 제가 담당했던 부처가 복지부, 노동부, 여성부, 교육부, 환경부, 문광부 6개 부처에 행자부 업무 중에 지방자치 부분까지 맡았습니다. 업무의 폭이 넓었는데, 해보니까 사회정책에 상당한 통합성이 필요하더라고요. 복지만 하더라도 복지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성부에도 있고, 노동부에도 노동복지가 있고, 또 일정 부분은 행자부의 공무원연금이라든지, 교육부의 사립학교 교직원연금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퍼져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김용익)

정책 중심의 통합성은 사회 관련 부처뿐만 아니라 경제 관련 부처까지 넘나들었다. 앞서 화물연대 사태의 ‘통합적 관리’ 실책 사례를 염두에 두고 들어보면 좋겠다.

“사회수석인 제가 경제부처 논의에도 참석하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다뤘던 비정규직 문제도 건설노동자, 화물차나 레미콘 운전자 등 대부분이 건교부 소관이었습니다. 또, 대부업은 경제부처 소관이죠. 처음에는 어디 소관이냐는 것도 불분명했어요. 나중에 ‘금감위가 주축이 되고 재경부와 복지부가 협조해라’ 이렇게 정리되었지만, 그런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경제분야라 하더라도 사회적인 문제는 사회수석실에서 다루기로 결정했어요. 부처별로 하면 저는 전혀 관여할 수 없는 것들이죠.”(김용익)



‘2인자’ 옛말이 된 이유…권한도 책임도 많아지고 나눠지다

비서실과 정책실 분리는 이처럼 참여정부 청와대 조직개편의 핵심이자 시스템 작동의 기본 구조였다. 다시 양 실장의 말을 통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명박정부가 초기에 없앴다가 부활시킨 것 가운데 하나가 청와대 정책실이었다. 이정우 초대 정책실장의 말이다.

“자기들도 해보니깐 필요했던 것이겠죠. 꼭 필요합니다. 비서실장은 굉장히 바쁩니다. 인사문제나 또 모든 행사에 참석하고, 그 안에서 생기는 문제를 다 조절해야 하니까요. 정책은 수석들이 부처와 조정해서 처리하는데, 자연히 그 위에서 총괄하는 것이 필요했지요. 정책실을 만든 것은 잘되었다고 보고, 또 굉장히 좋은 제도입니다.”(이정우)

“(비서실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 대한 보좌인데, 대통령의 의사결정 보좌도 물론 중요하고요. 또 하나는 대통령이 모든 국정현안에 대해서 다 보고받고, 논의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대통령보다 비서실장이 훨씬 더 많은 일을 접하게 돼요. 그래서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는 많은 일들을 대통령을 대신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죠. 그 정도가 대통령으로부터 비서실장한테 포괄적으로 위임되어 있는데, 저는 그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정도는 다르겠지만 밑에 수석들도 마찬가지고요.”(문재인)

그 결과 일도, 권한과 그에 따른 책임도 많아졌다. 반면 ‘2인자’나 ‘황태자’는 사라졌다. 많아질 건 많아지고, 없어질 건 없어졌다. 그런 과정이 투명하게 다 보여졌다. 그래서 이런 평가도 나오는 것 같다.

“참여정부 5년은 정부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데 가장 성공적인 정부였을 겁니다. 제가 참여했다고 자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책결정과정이라든가 투명성이라든가 그때보다 잘한 적이 언제 있었을까요.”(이해찬)


 



“아마추어가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 권위주의시절 ‘옛날 프로’들의 질문에 대한 몇 가지 답변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조직개편으로 인한 혼선과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부 시행착오 혹은 그밖에 자신들 ‘구미’에 맞지 않는 사안을 두고 몇몇 언론과 한나라당은 ‘아마추어정부’라고 혀를 찼다. 이에 대한 몇 가지 답변. 먼저 이병완 전 비서실장의 말이다.

“정권이 탄생하면 그 정권은 자기 가치와 정체성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정권을 잡으면 일단 보수정권이 되라고 일반화시키거든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아니, 정권을 안 잡아봤는데 그 사람 보고 국정경험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그럼 모든 정권은 되자마자 다 국정경험을 가진 전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써야 한다는 것밖에 안 되는 얘기죠.”(이병완)

“한 마디로 참여정부는 아마추어정부라기보다는 모든 대목에서 권위주의 행태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5년간 무던히 노력했던 정부예요. 그런 것을 아마추어라고 한다면 영원히 옛날로 가야 된다는 뜻이죠.”(문희상)

두 정책실장의 생각은 어떨까. 먼저 성경륭 전 실장의 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아냥거리고 헐뜯기 위해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기들 자리를 뺏긴다고 생각하는 관료들의 저항논리일 수도 있고요. 또 우리가 실력이 약한 부분이 있나 점검하는 측면에서 볼 필요도 있습니다. 제가 한 번씩 아마추어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행정수도 건설과 관련해서입니다. 우리 역사상 혁명적인 일들을 한 것인데, 그 공을 전부 한나라당 단체장이 가져갔고 참여정부는 별로 덕본 것 없어요.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너무 순진했고 그래서 아마추어였다고는 가끔 생각합니다.”(성경륭)

“아마추어정부라는 비판을 저는 별로 아프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좋게 생각했습니다. ‘옛날 프로’일수록 부패한 것이고, 아마추어일수록 참신하고 혁신적인 것이라 좋은 것이죠. 아마추어가 들어오면 보수언론이 일제히 포화를 퍼붓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가야한다고 봅니다. 거기에 개혁정부가 성공하는 비결이 있습니다.”(이정우)


 


 

<진보와 권력> ① 참여정부 지도제작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1화 - 대선 나흘 뒤 노무현 당선인 지시 “인수위를 짜시오”
 2화 - 54일간 참여정부 5년의 ‘국정지도’를 만들다
 
3화 - ‘노무현다운 시도’ 미완의 숙제를 남기다
  4화 - 이명박 정부식 조직개편은 인수위 때 ‘부적절’ 결론     
 
5화 - 노무현 대통령 취임, 참여정부 출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