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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질문 4] 진보정치가 가야 할 방법은?

노둣돌 2010. 12. 13. 11:07
[노무현의 질문 4] 진보정치가 가야 할 방법은?
(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 2010-11-04)


“신자유주의 교리 전부를 가지고 싸울 게 아니고 그중에서 핵심 의제 가지고만 싸우자. 핵심 의제는 뭐냐? 결국, 빈부 격차하고 노동 보호에 관한 문제, 분배와 재분배에 관한 것이 핵심이지요. 지금 한국의 전선이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유럽의 제3의 길하고 김대중 노선하고 한번 비교를 해보고 싶습니다. 유럽의 주류노선하고 제3의 주류노선하고 유사하게 가는 부분이 있다면, 김대중 노선 대 한나라당 노선으로 줄을 긋고 이쪽은 진보, 이쪽은 보수인 것으로 긋고 가보자는 겁니다.” - <진보의 미래> 192쪽

이 질문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먹고 살기 바쁜 일상을 사는 시민들이 어떤 정책의 결정과정, 그리고 그 정책이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알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러다 보니 조중동같은 사익추구집단의 감언이설과 왜곡, 야바위 논리에 휘둘리게 되고, 마침내는 자신의 이익과 배치되는 정책에 손을 들어주는 결과도 생긴다.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종합부동산세다. 전혀 해당 사항도 없는 시민들이 종부세에 반대하게 된 것은 순전히 <세금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시민을 협박한 언론 덕분이었다.

어디 종부세뿐인가?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거의 모든 정책이 그랬다. 진의는 왜곡되고, 그 왜곡된 정보를 수용한 시민들은 정책을 오해하게 된다. 그렇게 뒤죽박죽 된 야바위 논리가 판치다 보니 ‘오십보백보’가 득세한다. 정치인들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정책 결정과정에서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적인 절차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좀 더 간명하게 이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 실마리는 폴 크루그만의 <미래를 말하다>에서 얻었다. 그리고 비전은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에서 찾았다.

<미래를 말하다>는 미국의 진보와 보수 정치세력의 역사, 그리고 그들이 각각 집권했던 시기의 정책과 경제상황을 간명하게 비교한 책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쉽다는 점이다. 그 책을 읽으면 공화당을 찍으면 손해가 나고, 민주당을 찍어야 일반 시민들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유러피언 드림>은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다. 책은 다양한 쟁점을 중심에 놓고 미국의 방식과 유럽의 방식을 비교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종국에는 유럽이 가는 길이 모델이 될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래를 말하다>나 <유러피언드림>처럼 쉬운 말로, 어느 쪽을 선택해야 시민들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책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다 보니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보통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걸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 진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쟁점에 관한 검토를 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쟁점은 사실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민영화가 진보주의 가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내 얘기는 그런 것이죠. 규제를 더 하고 덜 하고 하는 것이 진보주의 전략이나 가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신자유주의니까 싫다는 거지요? 진보주의 진영에서는, 규제를 좀 하라는 거지요. 그러데 규제 많다고 진보주의가 잘되나? 필요한 것만 하면 되는 거지. 그렇지 않겠어요? 민영화한다고 진보주의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거든. 거기다 내가 하나 더 얹은 게, 개방이죠……. (중략)…… 신자유주의에 몇 개의 교조가 있는데 그 교조 몇 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처음부터 진보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죠. 진보의 가치를 반드시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출처 : 진보의 미래 1권 p218~219)

“진보와 보수가 실질적으로 가장 타협 없이 싸우는 쟁점은 ‘국가가 분배에 얼마나 깊이 개입할 것인가? 세금을 얼마나 거두어서 복지 지출을 얼마나 하고, 사회적 보장을 어느 수준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기준이 될 것이다.” (출처 : 진보의 미래 p79~80, p82)

“핵심적인 대립이 뭐냐, 복지와 분배입니다……. (중략)…… 시장 분배에 관해서는 노사관계고, 정부 분배에서는 복지와 분배 문제일 겁니다. 세금 문제로 연결되겠죠. 핵심은 그런 거 아닌가 싶어요. 이런 것을 기준으로 해서 진보냐 보수냐, 그렇게 가르지 않으면 결국 진보가 아주 협소한 자기 땅 이외에는 중간에 있는 많은 영역, 소위 생산성과 능률이라고 하는 측면, 말하자면 시장, 경제, 효율이 부분에 대한 영토를 다 포기해 버리게 되거든요.” (출처 : 진보의 미래 1권 p209)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사회 전체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문제에 국한하여(시민들이 여기에 집중하여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 폴 크루그만의 <미래를 말하다>처럼 쉬운 책을 쓰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진보의 미래 1권이 나오게 되었고, 미완성의 유고는 그렇게 질문으로 남아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문제만 해결되면, 즉 복지와 분배만 되면 한국은 좋은 나라가 되는가? 복지와 분배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한나라당도 대놓고 반대하지 않는다. 많고 적음의 차이일 뿐이다. “세금을 더 거둬서 분배를 더 많이 하자”와 “세금을 낮춰서 기업이 성장하면 국민들에게도 혜택이 간다. 그러니 복지는 좀 줄이자”의 차이다. 이런 정책의 차이가 ‘악’으로 규정될 이유는 없다. 어차피 국민들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결국 진보의 미래 1권은 대한민국 전체를 조망하는 책이 아니다. 복지와 분배가 관련된 경제문제에 국한된 정책교양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수많은 해법이 나와 있다. 그리고 너도나도 복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질문과 39명의 학자의 답변에 갇히지 않고, 사유의 폭을 넓혀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조희연의 답변] 노무현이 좌절하면서 굴복하지 않았던 벽을 넘어서자


사실 <진보의 미래> 1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일종의 옴니버스다. 그러다 보니 39편의 글이 전체적인 일관성을 갖기는 매우 힘들다. 오히려 그 하나하나가 일종의 토론 발제문처럼 되었다고 보는 게 좋을 듯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좋은 발제문의 모음이다. 각 부분 전문가들이 정성 들여 썼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그 내용에 관한 평가는 별개임을 밝혀두는 게 좋겠다.

노무현 대통령의 네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답변을 했다. 조 교수는 진보적인 성향의 학자다. 이른바 ‘리얼 진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조교수의 답변은 ‘리얼 진보’가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유주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 교수의 답변을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한다.


정권교체의 이유
 

조 교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성격을 <반독재 민주정부>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은 <신보수 정권>으로 부른다. 2008년에 이루어진 정권교체의 이유에 대해 조 교수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87년 6월 항쟁 당시 합의했던 개혁 의제들이 종결되었다는 점이다. 즉 이 당시의 개혁 의제는 민주화였고, 이는 민주정부에 의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어렵게 진행된’ 개혁도 (쉽게)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정치적 기반이 균열되어 갔다고 분석한다.

둘째로는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민주개혁의 성과조차 퇴색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최장집 교수와 그 제자들, 특히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성취했는지 모르겠지만,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소홀히 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박정희의 ‘성장주의’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신성장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어떤 한 두 가지의 이유로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는 곧 이유 아닌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 교수가 지적한 위의 두 가지 이유는 나름대로 일리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한국 정치세력의 지형

조 교수는 이 같은 결과 반독재 민주세력의 정치적 헤게모니가 약화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반독재 민주세력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관련 있는 정치세력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 교수는 한국 정치세력을 <구 독재적 보수세력>과 <반독재 자유주의>, <진보세력>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이름만 다를 뿐 세 번째 답변자로 나선 정해구 교수의 분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교수는 <반공성장주의>, <개혁적 자유주의>, <분배평등주의>로 분류했다. 개인적으로는 정 교수의 용어 표기와 분류가 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보다는 지향하는 정책을 중심으로 분류했기 때문이고, 북한에 대한 입장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는 한국정치의 고정변수로 인정해야 한다.

어떻든 세 개의 정치세력 간에는 두 개의 전선이 존재한다. 이것은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하나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과 전체 진보개혁세력> 간의 경쟁이고, 또 하나는 진보진영 내부의 <자유주의 개혁세력과 진보세력> 간의 경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표현이 점점 쓰기 싫어지지만, 전달의 편의상 어쩔 수 없이 쓴다.)

결국 관건은 진보진영 내부의 경쟁과 협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조 교수의 진단이 너무 비약적이다.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조 교수는 반독재 자유주의 정당(아마 민주당과 참여당 등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이 없기 때문에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개혁적 변신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진보 정치 세력(민노당과 진보신당을 말하는 것이다)이 반독재 자유주의 정당의 헤게모니 균열의 틈새를 비집고 대약진하는 경우이다. 진보 정치 세력의 핵심적인 정책 지향이자 정체성이 ‘반신자유주의’인데 이는 반독재 중도자유주의 세력이 ‘좌절’한 바로 그 지점을 돌파하는 불가격한 지향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 <노무현이 꿈꾼 나라> 71쪽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이 국민정치적 공간에서 매파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 현재의 상황은 진보 정치의 확장이라는 점에서는 새로운 ‘열린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 위의 책 75쪽

글쎄? 그럴까? 조 교수가 가진 지식과 이론, 그리고 논리로 ‘추론’하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성이 떨어진다. 조 교수의 머릿속에 있는 대중은 ‘현실의 대중’이 아니라 ‘관념 속 대중’이 아닌가 싶다.

동의하지 않지만, 만약 신자유주의를 기준으로 분석한다면, 직설적으로 말해서 지난 대선에서 대중들은 신자유주의를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이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보여진다. 김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국민들은 솔직히 왼쪽 주머니에는 노무현의 가치를 담고, 오른쪽 주머니에는 이명박의 가치를 담고 싶어 한다.” - <노무현 이후 - 새 시대의 플랫폼은 무엇인가> 13쪽

이게 현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분석이 아닐까? 한국의 진보를 추구한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중은 늘 선하다’는 전제를 깔아놓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와 이타, 탐욕과 절제, 경쟁과 협동이 동시에 내재된 존재 아닌가? 주어진 상황과 조건이 어느 쪽으로 작용하는가에 따라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한 게 인간이 아닐까?

나는 대중들이 신자유주의에 얼마나 반대하는지 구체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대중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뚜렷한 증거는 없다. 추론일 뿐이다. 유일한 증거가 있다면 2007년 대선에서 명백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운 이명박이 당선됐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대중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추론할 수 있을까?

그러니 조 교수의 머릿속에 있는 논리로 볼 때는 진보세력이 자유주의세력을 대체할 가능성이 많다는 결론으로 가게 된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역시 현실이 빠졌다. 정당 지지율을 봐도 그렇다. 특히 ‘리얼 진보’와 ‘반신자유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진보신당의 1%대 지지율을 보면 조 교수의 논리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그나마 민노당의 경우엔 교조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유연한 자세로 돌아섰기 때문에 지지율이 조금 올라간 것이다. 그것도 이정희라는 좋은 정치인이 끌어낸 효과도 크다.

실사구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사실 속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자세를 말한다. 조교수의 분석은 실사구시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조 교수는 진보세력이 ‘대약진’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해결과제가 있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진보세력은 ‘리얼 진보’라고 주장하는 진보신당과 민노당 등을 말한다.)

“하나는 이명박 정부하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약자 집단들의 대중 투쟁과 결합하면서 (급진) 진보세력의 대중적 기반 자체를 확장해 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연한 헤게모니 형성 전략’을 통하여, 이명박 정부로부터 이반하는 대중들, 그러나 반독재 자유주의 정당을 신뢰할 수 없는 대중들을 획득하여 진보 정당의 지지자로 전환시켜 내는 것이다” - 위의 책 71쪽

조교수가 제시한 해법은 바람직하다. 진보세력은 조 교수가 제시한 해결과제를 풀어내면 폭넓은 대중정당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미 첫 번째 과제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진보신당에 많은 시민들이 가입했지만, 그들의 완고한 사상적 교조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원위치하고 말았다. 오히려 지방선거 과정에서 조 교수가 제시한 두 번째 해법과는 반대의 길을 걷고 더욱 세력이 축소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민노당의 경우엔 조교수의 해법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고 보여진다.

결론적으로 조 교수의 진단과 해법은 ‘관념적 사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는 수학문제를 풀듯이 추론이 논리적으로 맞다고 하여, 현실이 그 논리에 맞춰지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은 수학이나 과학의 공식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사회경제적민주주의로…

최장집 교수와 그 사단이 참여정부를 끊임없이 공격했던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키워드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공격하는 ‘리얼 진보’의 공통된 주장이기도 하다.

사회경제적민주주의는 참 좋은 말이다. 방향성도 옳고,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결국 복지를 확충하는 방향이고, 기본적인 생존권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지향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동의하고 있는가? 여론은 동의하고 있는가? 추동할만한 정치세력은 있는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증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도 재원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국가에서 화폐를 마구 찍어내기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미래세대의 몫을 지금 당장 끌어다 쓰고 빚을 넘겨줘도 되는 것일까? 재벌들이 양보를 하면 재원확보가 되는 것일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참여정부 5년은 관념과 의식의 과잉이 어떤 현상을 빚어내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시기라고 본다. 의식과 관념의 진보성이 어떻게 사회발전의 추동력을 잃게 만드는지도 보았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개혁은 곧 양극화와 빈곤을 해소하는 것이다. 맞다.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해법은 갖고 있는가? 문제제기만 했지 해법을 제시한 전문가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우리나라 진보주의 학자들이 빈부 격차에 대해서 원인 분석이나 대책이 별로 없어요. 그냥 개방에 대해 공격하고 민영화에 대해 공격하고 노동의 유연화에 대해 공격하고. 공격하는 것이 이제 그런 것이죠.” - <진보의 미래 1권> 249쪽

정리해야겠다. 조 교수는 좀 더 현실을 살아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특히 ‘리얼 진보’를 외치는 지식인들과 그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관념적 진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몇 개의 이데올로기로 이 세상을 재단하고,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실사구시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 세상은 실험실이 아니다. 수학 공식을 푸는 곳도 아니고, 물리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도 아니다. 단순한 가설 몇 개와 변수를 대입한 경제모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조 교수의 결론을 인용한다.

“보수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이 존재하고 있다면, 진보에게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산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유산들이 진보적으로 재해석되면서, 대중의 신뢰를 재획득하는 과정이 이명박 정부하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노무현이 꿈꾼 나라> 79쪽

문구 자체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앞선 내용에서 조 교수가 제시한 원인분석과 해법으로는 성장주의 세력을 넘어서기 힘들 것 같다. 오늘도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관념 속에 존재하는 대중이라는 허상은 그만 잊는 게 좋겠다. 그리고 노무현의 유산을 재해석하는 것이 ‘리얼 진보’류의 주장이라면 대중들과는 더욱 멀어질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이명박류의 신성장주의를 넘어 서기는 더욱 요원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논리적인 추론이라면 추론이다.

 

스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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