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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질문 6] 보수란 무엇인가, 진보란 무엇인가

노둣돌 2010. 12. 13. 11:11

[노무현의 질문 6] 보수란 무엇인가? 진보란 무엇인가?

 

"이제까지 진보-보수 한참 얘기했는데 진짜 이게 뭐냐? '사상적으로 이게 뭐냐'라는 것을 한번쯤 짚고 넘어가 보자. 지금까지는 진보를 통째로 보고 돈 얘기를 중심에 두고 국가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얘기했는데, 본질적으로 철학적으로는 뭐냐? 그래서 이제 사전적 개념을 한번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진보주의의 가치와 철학이 뭐냐? 보수주의-진보주의의 가치와 철학이 뭐냐? 진보주의니 보수주의니 하고 서로 싸우는데 왜 그러냐,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냐? 이런 얘기입니다." - <진보의 미래> 120쪽

사실 지금부터 지나간 역사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우리가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를 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 흘러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싸워온 역사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문제를 풀어가는 데는 별 소용없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관념적인 사변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경계심을 갖고 역사를 공부한다는 의미로 접근한다면 그리 불필요한 이야기는 또한 아닐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여섯번째 질문에는 전북대의 박동천 교수가 답변자로 나섰다. 어려운 질문이라서 답변이 꽤 길다. 잘 정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해보기로 한다.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fp_forum&uid=276

 

 

 

 

 

[노무현의 질문 6] 보수란 무엇인가, 진보란 무엇인가
(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 2010-11-05)


“이제까지 진보-보수 한참 얘기했는데 진짜 이게 뭐냐? ‘사상적으로 이게 뭐냐’라는 것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가 보자. 지금까지는 진보를 통째로 보고 돈 얘기를 중심에 두고 국가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얘기했는데, 본질적으로 철학적으로는 뭐냐? 그래서 이제 사전적 개념을 한번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진보주의의 가치와 철학이 뭐냐? 보수주의-진보주의의 가치와 철학이 뭐냐? 진보주의니 보수주의니 하고 서로 싸우는데 왜 그러냐,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냐? 이런 얘기입니다.” - <진보의 미래> 120쪽

사실 지금부터 지나간 역사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우리가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를 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 흘러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싸워온 역사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문제를 풀어가는 데는 별 소용없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관념적인 사변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경계심을 갖고 역사를 공부한다는 의미로 접근한다면 그리 불필요한 이야기는 또한 아닐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여섯 번째 질문에는 전북대의 박동천 교수가 답변자로 나섰다. 어려운 질문이라서 답변이 꽤 길다. 잘 정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해보기로 한다.

[박동천의 답변] 시간과 공간의 변화 앞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진보와 보수란 무엇인가? 영어 표기로는 각각 progreesived와 conservative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libera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미래를 말하다>의 원제목은 The conscience of a Liberal인데 <어느 진보주의자의 양심>으로 번역된다. 중요한 것은 그 개념이 무엇이냐이다. 어떤 확정적이거나 절대적인 뜻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이다. 한국에서는 ‘리얼 진보’니 ‘사이비 진보’니 하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절대적인 개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여섯 번째 답변자로 나선 박동천 교수는 여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한국의 지성계는 선험주의적 사고방식이 검토 없이 횡행하는 풍조 때문에 어떤 단어에 한 가지 정해진 뜻이 있어야 하는 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데, 다른 영역의 언어들은 접어 두더라도 적어도 정치의 세계에서 사용되는 말들은 맥락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고 봐야 한다.” - <노무현이 꿈꾼 나라> 101쪽

더구나 진보와 보수라는 언어가 상대방을 모욕을 주거나 나쁜 사람들임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도 지적한다.

“‘진보’라는 단어든 ‘보수’라는 단어든 이처럼 상대에게 낙인을 찍기 위해 사용될 때에는 가치나 지향성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 위의 책 102쪽


상대성

그래서 박 교수는 진보와 보수의 개념에도 상대성을 접목시킨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폭을 무한정으로 허용하더라도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하는 본질적인 의미 같은 것은 진보에도 보수에도 있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선언’한다.” - 위의 책 103쪽

이 말의 의미는 진보와 보수의 개념도 시간과 공간이 변화함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의미다. 즉 고정되어 있는 어떤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연상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그렇다. 19세기 전후의 각국에서 벌어진 혁명은 ‘자유주의 사상’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 당시에는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절대왕정체제 속에서 시민들에게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누가 봐도 진보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등장하면서 자유주의 사상은 보수적인 사상으로 취급당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사상은 진보적인가? 적어도 인류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다. 소비에트체제는 스탈린에 이르러 지독한 보수사상이 되었다. 중국의 사회주의 사상은 진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18세기와 19세기의 경우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그 당시 민족주의는 식민지로 전락한 국가에게 진보적 사상이었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민족주의는 국가주의 형태로 진화하여 대학살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유럽 각국에 등장하고 있는 민족주의는 극우로 분류하고 있다.

결국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절대적 개념을 부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처한 환경, 사회적 분위기 등에 따라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유해야 할 개념이지 “이것이 진보다”라고 감히 외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뭉뚱그려 묶어 볼 수는 있다. 개념으로 규정할 수는 없어도 ‘경향성 혹은 지향성’으로 분류할 수는 있다. 이 부분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와 보수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참조해보자.

“진보의 가치는 뭐냐? 연대, 함께 살자. 이거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교리하고도 맞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입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따지면 공존의 지혜이고, 종교적 교리로 따진다면 그건 하늘과 신의 뜻이다. ‘더불어 서로 사랑하고’ 이게 연대의 정신이잖아요. 그리고 다 같이 하느님의 자식들로 평등하게 태어나서 서로를 존중해라,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자유 평등 평화 박애 행복 이게 고스란히 진보의 가치 속에 있는 것이거든요.” - <진보의 미래> 213쪽

그런데 이런 의문은 남는다.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자유, 평등, 평화, 박애, 행복이라는 가치를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따뜻한 보수’를 말하고 ‘자선’을 말한다. ‘성장주의’를 무조건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식에 대한 생각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기부도 많이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열심히 피땀을 흘리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국가의 시혜적인 복지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복지지출에서 낭비되는 예산도 많고, 부정한 방법으로 복지비를 빼내는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스펜서의 적자생존이론을 인간의 삶에 투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을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에는 분단상황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존재한다. 국가의 역할, 즉 정책 부문에 있어서는 복지증대 등에 찬성하면서도 북한에 대한 우호정책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 이 경우 보수라고 해야 하는가? 진보라고 해야 하는가? 진보는 무조건 대북정책에 있어서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가?

소위 ‘운동권’에 횡행했던 상명하복식 전체주의적인 문화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또 그 안에 존재했던 성폭력 문제는 어떤가? 권위주의 문화는 또 어떤가? 입으로 내세우는 구호가 진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쯤 되면 온통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 소위 진보진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과연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나온다.

이제 뒤죽박죽을 정리해보자. 결국 진보와 보수라는 관점은 상대적이다. 그리고 광범위하게 진보냐 보수냐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진보와 보수는 어떤 경향성이나 성향으로 분류할 수는 있겠지만, 딱 부러지게 집단으로 묶어내기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그래서 박 교수도 이렇게 중간 결론을 내린다.

“진보/보수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역사적 맥락이라는 배경 위에서 실제로 불거진 어떤 쟁점을 둘러싸고 갈라진 진영의 균열을 쉽게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상대적 명칭이라는 의미가 짙다.” - 위의 책 107쪽

그렇다. 상대적 위치다. 그래서 경향성이나 성향으로 집단으로 묶어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노동, 교육 등 온갖 현실문제에 부닥치면 그 성향이라는 것도 산산이 부서진다. 진보적 성향이라고 해서, 혹은 보수적 성향이라고 해서 각각의 문제에 동일한 성향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리버럴과 진보

이렇게 되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이런 결론은 이 세상을 진보와 보수로 명확하게 갈라치는 것 못지않게 관념적이기도 하다. 가치상대주의는 가치가 없다는 허무한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향이나 성향, 지향성을 바탕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실사구시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당과 그 나머지 당은 차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박 교수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리버럴(liberal)’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인다.

리버럴은 ‘자유주의’로 표현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흔히 보수주의로 몰린다.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창한 유시민을 향해 쏟아지는 비판 가운데 하나는 ‘진보와 자유’라는 ‘모순개념’을 뒤섞어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담겨 있는 의미는 ‘자유주의는 진보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같은 해석에는 ‘자유주의’를 ‘경제적 자유주의’로 국한하는 오류가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진보든 보수든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등의 보수세력이 말하는 자유주의는 오직 ‘시장의 자유’, 즉 ‘경제적 자유’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리얼 진보’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자유주의를 보수주의 사상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노무현도, 유시민도 ‘가짜 진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 외에도 ‘정치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문화적 자유주의’ 등도 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를 보수다, 진보다, 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박 교수는 ‘리버럴’이 진보 세력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버럴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여전히 진보 세력의 자산이다. 그 이유는 물론 18세기와 19세기에 영국 자유당이 당시로써 진보의 축을 형성했기 때문인데, 동시에 리버럴이라는 형용사에 ‘개방적’이며 ‘너그럽다’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모든 종류의 교조주의, 획일성, 엄숙한 조직적 기강 등과 대척되는 의미가 리버럴이라는 단어에 함유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계몽주의 이래 진보 정치의 이념에서 중요한 위상을 확보해 온 요소인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점이 충분히 음미 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 위의 책 113쪽

그리고 이를 토대로 박 교수는 두 가지 관점에서 진보와 보수를 분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먼저 그림을 보자.

▲ 출처 : 위의 책 114쪽

먼저 <그림 1>은 경제적 이익의 분배 방식을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한 것이다. 보통 좌파와 우파라고 구분하는 그것과 동일하다.

반면 <그림 2>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다. 박 교수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본다.

“<그림 2>는 사고의 배타성 대 개방성을 수직축에 표시했다. 배타적 사고방식은 경직성을 불러오기 쉬운 반면에 개방적인 사고방식은 차이에 대한 관인(寬忍)과 아량과 통하기 쉽다. 이 차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성을 일반적으로 불신하느냐 아니면 신뢰하느냐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 위의 책 114쪽

박 교수는 리버럴의 핵심을 개방성으로 들면서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라고 말한다.

“진보의 이념은 이와 같은 인간성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가 없다면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게 된다……. (중략)…… 사회의 질적인 개선을 명분으로 삼더라도 폭력이라는 수단은 가능한 배격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공론이 결국은 옳은 방향을 찾아가리라는 믿음 아래 자신의 소신을 이웃에게 말로 전하는 기풍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위의 책 115쪽


공론의 영역과 권력의 영역

여기서 잠깐 <공론의 영역>과 <권력의 영역>에 대해 살펴보자. 박 교수는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리버럴의 개념을 적극 수용해야 함을 이야기하기 전에 공론의 영역과 권력의 영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는 근대과학이 싹트고 번성하던 시기였다. 그 결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상징되듯, 사회를 분석하고 전망하는 데에도 과학이론이 동원되었다. 그 결정판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임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유물론 역시 과학지식으로 인간세상을 내다본 결과물이다. 물리법칙이 인간세상에도 적용된다고 여겼다.

인간이 사는 세상을 과학적인 설계를 바탕으로 인간의 필요에 맞게 변경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소비에트연방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바로 데이비드 흄과 에드먼드 버크다. 이들은 인간 사회는 설계의 결과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관습으로 조성된 조형물임을 강조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한 미국을 여행한 후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토크빌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약육강식을 위주로 하던 사회생활의 형태가 약자를 배려하는 형태로 바뀌는 일은 권력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거쳐 공론의 형식과 내용이 속속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고 버크는 생각했다.” - 위의 책 110쪽

사실 이 내용은 바로 앞의 글, 즉 노무현의 다섯 번째 질문과 연관된다. 즉 “민주주의와 진보의 미래는 시민들이 생각만큼 간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즉 국가권력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공론의 영역>과 <권력의 영역>을 구분하고 <공론의 영역> 차원에서 추구해야 할 일은 <권력의 영역>에서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20세기에 등장했던 전체주의 체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소비에트연방과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홍위병을 동원해 중국을 암흑기에 빠트렸던 문화대혁명이 그렇다. 국가권력이 시민영역을 설계하고 진두지휘한 결과는 참담했다. 중국의 경우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후유증에 벗어난 것은 1978년 등소평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위대한 해방을 일으켜야 합니다”라고 선언한 이후다.

우리나라의 ‘리얼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미의 차베스 등 좌파정권에 은근히 기대를 품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리얼 진보’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향해 비판했던 논리들이 대부분 국가권력으로 모든 걸 해치울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 ‘리얼 진보’에게 ‘리버럴’은 ‘가짜 진보’로 치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리얼 진보’와 ‘가짜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은 리버럴의 우려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들은(버크, 흄, 밀 등의 리버럴) 모두 마르크스-엥겔스-레닌 류의 국가사회주의에 비하면 보수인 것처럼 비칠 수 있다. 반면에 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공론의 변화에 맡겨야 할 일을 권력으로 해치우겠다는 발상이 철부지들의 섣부른 불장난으로 보였다. 인간 사회의 실재를 오해하여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설쳐대다가는, 사회를 해치고 자기를 해치는 결과밖에 없다는 지적이었다.” - 위의 책 111쪽


정치현실의 전체 구조와 모습을 함께 고려해야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간 ‘리얼 진보’와 ‘가짜 진보’ 이야기는 지겹도록 들었다. 그래서 박 교수는 이렇게 조언한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에 관해서 정책 지향이라고 하는 평면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정치 현실의 전체적인 구조와 모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바람 또는 규범적 주장을 이 글은 담고 있다……. (중략)…… 한 정치인, 한 정당, 한 정권을 진보로 봐야 할지 보수로 봐야 할지를 한두 가지 사안만 가지고 판정하다가는 체계적인 정치의식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매개되지 못한 개인감정에 휩쓸리기 쉽다.” - 위의 책 116쪽

그리고 이 같은 관점에서 박 교수는, 한국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목표치를 제시한다. 이 목표치 역시 가변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오늘을 바탕으로 한 목표치일 뿐일 것이다. 박 교수가 전개한 논리로 볼 때 그렇다. 시간과 공간은 계속 변할 테니까.

“길어야 5년 주기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 현실에서는 사회적 자유주의(소셜 리버럴)의 정도의 목표가 가능한 진보의 최대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적어도 사법적인 권리에서는 기득권 보유자들과 동등한 항변권을 가지고, 나아가 누진세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서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되는 정도의 목표이다.” - 위의 책 118쪽

참 소박하다. 하지만 한국 현실에서는 이마저도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 참여정부 5년 동안 추진했던 것이 바로 박 교수의 소망과 비슷했다. 시민들이 자유권을 충분히 누리는 사회, 그리고 국가가 최소한 생존권은 보장해주는 사회가 소셜 리버럴의 소박한 목표다. 유시민의 ‘진보적 자유주의’ 역시 같은 맥락이다.

결론이다.

진보가 무엇이냐? 보수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에 박 교수는 절대적인 개념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상대성의 개념으로 파악하며, 어떤 성향으로 분류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즉 지향하는 가치나 정책이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폐쇄적이라면 보수적 성향이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진보진영에서는 보수주의로 치부하고 있는 자유주의, 즉 리버럴을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으며, 오늘의 한국을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도달할 수 있는 진보의 최대치는 사회적 자유주의(진보적 자유주의 혹은 소셜 리버럴)이라고 결론짓는다.

결국 이것이 진보다, 저것이 보수다, 라고 규정짓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서 그 개념이 변한다는 박 교수의 전제에 의하면 당연한 결론이다. 개인적으로 박 교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스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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