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노무현 평전을 쓰는가
2011/09/01 08:00 김삼웅

김해 봉하마을 들판에 자색벼로 고 노무현 대통령 얼굴과 '내 마음 속 대통령'이란 글자가 만들어졌다. ⓒ사람사는세상
오늘(9월 1일)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생 65주년입니다.
노 전대통령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신지 2년이 지난 시점, 생신일에 즈음하여 평전을 시작하려니 만감이 교차한다.
성삼문 등이 수양대군의 왕위찬탈로 쫓겨난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변절자의 밀고로 모두 붙잡혀서 능지처사의 참변을 당하였다. 찢긴 시신이 새남터 저잣거리에 며칠째 방치되었을 때에 매월당 김시습이 홀로 이들의 사체를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 이로써 사육신의 묘소가 남게 되었다.
세조가 영월에 귀양간 단종을 죽이려고 금부도사를 내려 보냈다. 금부도사가 차마 사약을 올리지 못하여 시종배들을 시켜 옛 군주를 목졸라 죽이게 하였다. 비명에 간 단종의 시신은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거두지 않았으나 나중에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두어 염하였다. 이로써 단종릉이 남게 되었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호가 추강(秋江)으로 스승 김종직이 존경하여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할 만큼, 인물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속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았다.
추강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항거하다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사적이 인멸되고 왜곡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그들의 전기를 바르게 써서 후대에 남기고자 하였다.
제자들과 이웃에서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극구 만류했지만, 선비가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들의 명예를 소멸시킬 수 없다 하고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세상에 내놓았다. 이로써 <육신전>이 남게 되었다.
추강은 이로 인해 갑자사화 때인 1504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육신전>은 불태워지고 읽는 사람도 화를 입었다. 추강의 이 전기가 아니었다면 사육신의 충절은 크게 왜곡되어 전하게 되거나 잊혀졌을지 모른다. 추강은 부관참시를 당한지 278년이 지난 1782년 (정조 6)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세상에서는 원호ㆍ이맹전ㆍ김시습ㆍ조려ㆍ성담수와 함께 생육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매월당과 추강은 수양대군의 권력찬탈과 전임 국왕을 비롯하여 충신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상에 나갈 뜻을 버리고 산수간을 떠돌며 시문을 짓고 초연하게 살았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어떤 권력자들보다 높이 여긴다.
매월당은 중국 후한 말 동탁(董卓)의 발호를 암시하여 세조의 폭정을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동탁은 한나라 왕실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어린 황제 유변(劉辯)를 폐위시키고 헌제를 옹립한 것이다. 세조의 행위가 이를 꼭 닮았다.
개에게 뼈다귀를 주지마라
개들은 떼로 모여 어지러이 다투어선
자기 무리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종당에는 제 주인과도 어그러지리라
주(周) 왕실 높인다며 정벌을 일삼고
한실(漢室)을 안정시킨다면서 어린 황제 죽이다니
명분을 엄하게 해서
근왕하여 예 갖춤만 못하여라.
노무현 전대통령의 평전을 준비하면서 수양대군과 동탁, 단종, 매월당 김시습, 추강 남효온, 엄흥도가 떠오른 이유를 알 수 없다. 추강의 <육신전>때문일 터이지만, 더 깊은 ‘역사의 맥’도 작용한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가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서 <노무현 평전>을 썼대서 부관참시를 당할 시대는 아니다.
또 이미 노 전대통령의 자서전을 비롯하여 측근, 주변인들의 각종 저서와 연구논집이 간행되었다. 그럼에도 다시 평전을 시작한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여전히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세력들 중에는 고인을 욕되게 하는 언행이 그치지 않고, 고인이 필생으로 추구했던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가 ‘용납되는’ 사회로 급전되는 사회현상 때문이다.

당선이 확정된 직 후 민주당사에서 꽃다발을 받은 노무현 당선자와 권양숙 여사. ⓒ마이너
그리고 고시에도 패스하고 국회의원에도 당선된 그가, 무엇 때문에 기득권층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피압박 서민의 편에 서게 되었는가, 다시는 그와 같은 정치인을 볼 수 없을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이다.
<청암 송건호평전>의 말미에도 썼지만 중국 혁명의 선각자 양계초(梁啓超)의 정신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 각자 그 책임이 있다. 대장부가 책임을 안다는 것은 인간구실의 시작이며,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인간구실의 마지막이다.” (<방관자를 꾸짖는다>)
나는 그의 죽음과 죽임을 지켜봐온 당대인으로서, 현대사 연구와 기록자로서, 그리고 남효온의 정신으로서, 노무현 전대통령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임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2009년 5월 23일, 진영읍 부엉이바위에서 뿌려진 선혈(鮮血), 그 처연한 핏자국이 풍상으로 씻기우기에는 너무 비극적이고, 죽임으로 몰아간 한국사회의 야만성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변방인이었다. 집권기간에도 이 나라의 권력은 보수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그의 말과 정책은 끊임없이 조롱당하고 우롱당하고, 정책은 배척되었다. 자신을 뽑아준 정당의 일부까지 합세한 보수세력은 그를 탄핵하기에 이르렀고, 퇴임 1년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내몰렸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과 죽임은 단순히 현대사의 일과성 사건이 아니다. 진보 개혁 인물을 거부하는 한국 수구보수세력의 총체적인 힘의 작동이었다. 멀리는 조광조와 전봉준, 가까이는 김구ㆍ조봉암ㆍ김대중(미수)ㆍ장준하를 죽인 한국적 ‘길로틴’의 야만성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 노무현과 노무현정신의 본질을 찾는 작업이 중요하다. 따지고 보면 노무현은 이 땅에서 최후의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비정규직 확대와 양극화의 심화로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
노무현은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각고의 노력으로 고시에 합격하고 인권변호사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을 변호하고, 정계에 나와서는 기득세력에 편입되어 폼잡는 국회의원이기 보다는 서민대중의 대변자로서, 청문회스타로서 참된 정치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는 야당세력의 일각이 군사독재세력과 야합하는 3당 합당에 부산에 지역구를 둔 정치인이면서도 이를 거부하면서 외톨이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정치 1번지 서울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서도 이를 버리고 지역갈등의 해소를 위해 불모지 영남 선거구를 택해서 내려갔다가 낙선하는 ‘계산’할 줄 모르는, 아니 타산보다는 바른 길을 택해 온 ‘바보’였다. 백범 김구를 존경했던 그는 백범의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다”라는 명제를 실천한 흔치 않는 정치인이었다.
노무현의 투신 소식에 미국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한국 대통령 역사상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이라고 논평할만큼 ‘불행하고 비극적’인 이 사건은 그가 퇴임 1년여 만에 “고통이 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토로할 정도로 공정해야 할 국가형벌권이 남용되고, 권력화된 언론의 횡포가 죽임의 형구(刑具)가 될만큼 한국사회의 모순구조를 보여주었다.
노무현인들 왜 실책이 없었겠는가.
대연정 제안, 한ㆍ미자유무역협정(FTA) 졸속 추진,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확대와 양극화 심화에 대한 정책적 대안 미흡 등 과오와 실책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원칙을 지켜내려는 개혁을 꾸준히 실천하고, 청와대의 권위주의적 권력행사를 중단했으며, 각급 선거에서 돈 들지 않은 공정한 선거의 틀을 만들어 정치판을 정화시켰다. 무엇보다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주었다.
그는 권력과 부의 세습에 찌든 한국사회에, 그래서 희망과 삶의 의욕을 잃은 다수의 민초들에게 한 바가지 맑은 마중물의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수구 기득세력에게는 이것이 크게 못마땅했고 멸살의 대상이 되었다.
친일과 친미, 친독재를 통해 구축해 온 특권과 부를 대대손손 세습하면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노무현의 ‘특권이 없는 사회’는 정말 용납할 수 없는 도발이었다. 그것도 대통령이 된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는 데는 피가 거꾸로 치솟았을 것이다.
국권을 일제에 넘기고도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 특권을 유지하고, 주권을 독재자에게 넘기고도 감투와 특혜를 받아 부귀를 누려온 자들이었다. 어떻게 형성한 특권인데, 학벌도 없는 촌놈이 갑자기 나타나 수백년 누려 온 한국적 ‘카스트제도’를 허물려 한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링컨의 ‘노예해방’에 아메리카의 거대 지주계급이 분개하고 마침내 그를 죽였듯이, 이 땅의 특권층은 ‘카스트제도’를 허물려고 선동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종북좌경의 딱지를 붙이거나 죽음으로 몰아갔다.
노무현에게 ‘허물’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남북화해 협력의 추진이었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개성공단의 가동 등은 분단과 대북증오심을 이데올로기로 무기삼아 특권과 부를 누려온 자 들에게는 용납되기 어려운 제거의 대상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그 길을 닦았지만, 그는 이미 노령이고 병환으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타깃은 노무현이었다. 그는 아직 젊었고 봉하마을은 마치 무슨 성지처럼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았다.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모한디스 간디는 1947년 6월 3일 영국총리 클레멘트 애틀리가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리를 발표하고 국민회의와 이슬람 동맹이 이에 동의했다. 통일국가 수립에 전력해온 간디는 이를 ‘정신적 비극’이라 부르면서 9월 1일부터 칼라카타에서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해를 위해 단식에 들어갔다. 해가 바뀌어 1948년 1월 20일, 뉴델리에서 간디를 노리는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1월 30일 힌두교 광신자에 의해 간디는 뉴델리에서 암살되었다. 분열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통일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이 세상에서 암살 중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것은 ‘자살형’이다. 지령자와 하수인, 정범과 종범이 가려지지 않고 형법을 비롯하여 각종 실정법을 피할 수 있으며, 지지자들로부터 저항과 분노의 대상을 삼제(芟除)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정법을 피한다고 하여 역사의 법정과 하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3심제가 있듯이 자연계에서는 실정법 심판, 역사심판, 그리고 하늘의 심판이 전개된다.
노무현의 평전을 통해 그의 기구했던 생애와 삶, 추구했던 가치와 이상을 찾고자 한다.
고통의 세월, 고뇌의 심연을 둔한 붓으로 다 그려내기에는 벅찬 과제이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다짐한다.
돈 몇 푼에 영혼을 파는 ‘직업 알바’들의 조직적인 음해가 예상되지만, 남효온의 의기와 양심적인 민초들의 응원으로 이를 격파하려 한다.
많은 성원과 격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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