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죽임의 배후 보수세력의 ‘구조’
노무현 평전/[1장] <노무현 평전> 서설 2011/09/03 08:00 김삼웅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었을 것이다. 마치 코카서스 바위에 묶여 사나운 독수리에게 생간(生肝)을 뜯기우는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아픔을 여러날 동안 겪었다. 영육의 아픔보다 이제까지 지켜온 삶의 가치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아 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광주학살의 주범과 정범(正犯), 대통령 선거에서 수천억을 주고 받고, 외환위기(IMF)를 불러온 자들이 건재한 나라에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전임 대통령이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곤경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온갖 수모를 견디다 못해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면면한 한국현대사의 모순 구조가 다시 작동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가해진 정치보복의 양상은 야만의 극치였다. 행위 자체는 ‘야만의 극치’였지만, 본질은 어디까지나 한국사회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모순의 ‘구조’에 있었다. 김대중ㆍ노무현에 이은 또 다른 민주진보 정권의 탄생은 잃어버릴 것이 많은 그들에게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노무현의 건재와 봉하마을의 현상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치명적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거기에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상실감과 원한도 깊었을 것이다. 노무현이 건재하고 하루 수천명씩 봉하마을에 찾아가 ‘서민대통령’과 소통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2008년 여름의 ‘촛불항쟁’의 진원지를 엉뚱하게 봉하쪽을 지목하던 터였다.
2008년 5월 22일 저녁, 노무현에게는 이승에서 마지막이 되는 날의 밤이다.
만감이 교차하고 삶에 대한 욕구와 가족ㆍ친지ㆍ동지ㆍ국민에 대한 사랑과 미련이 교차되었다.
세익스피어는 <햄릿>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 속으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바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어 반대함으로써 이를 근절시키는 것이?
죽는 자는 잠자는 것
그 뿐이다. 만일 잠으로써 우리의 육체가 상속받은 마음의 고통과
수 천가지 피치 못할 충격을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열렬히
원한 극치,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 아마 꿈꾸겠지.
이날 밤 노무현의 심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조선조 인조 5년(1627), 후금(後金)이 침입한 정묘호란으로 나라가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
뒷날 북벌이 추진될 때 최효일(崔孝一)은 기개 높은 선비였다. 그는 북벌군이 진공할 때 현지에서 봉기하고자 청국의 수도 심양으로 잠입할 것을 지원하였다. 최효일은 출발을 앞둔 밤에 시 한 수를 지었다.
萬古爲長夜
何時日月明
男兒一掬淚
不獨爲金行
만고에 기나 긴 밤인데
어느 때에나 해와 달이 밝을 것인가
남아가 한번 눈물을 훔친 뜻은
금일의 행차를 위함만은 아닐세. (주석 3)
이날 밤 노무현의 심사(心事)가 이렇지 않았을까.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면서 최후의 눈물을 훔치며 짧은, 그러나 깊은 의미가 담긴 유서를 쓰지 않았을까. 아니면 대통령 후보경선의 밤과 대선 개표날 저녁에도 태연하게 잠을 잤다는 걸로 봐서 이 밤도 그냥 푹 잤을지 모른다. 아니면 죽음의 공포와 삶의 허망함이 오버랩되어 한동안 망설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운명’을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게 ‘운명’은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의 집합이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삼한갑족의 후예로서 형제들의 모든 재산을 털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생애를 조국독립에 바친 우당 이회영이 평생의 지기이며 열렬한 독립운동가인 보재 이상설의 비보를 듣고 “운(運)이여, 명(命)이여.” 하며 긴 밤을 지새웠듯이, 이날 밤 노무현도 자신에게 닥친 운명 앞에 이러지 않았을까.
그는 운명을 ‘체념’(諦念)하고 있었다.
“도리를 깨닫는 마음”의 체념 말이다. 그에게 운명은 ‘자연의 한 조각’으로 표현되는 생과 사의 그네뛰기 방식을 넘어선다. 항상 정직한 그러나 힘겨운 길, 원칙과 소신의 가시밭길을 택했던 그에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명예였다. 그리고 자존이었다. 명예와 자존은 노무현이 지키고자 했던 최후의 마지노선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운명이라 믿었고 체념의 길에 들어섰다.
단재 신채호는 중국 망명지에서 거의 혼자 힘으로 발행한 잡지 <천고(天鼓)> 제3집에서 새로 부임해오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강우규 선생을 애도하며>라는 글에서 사건의 전말을 대략 기록하고, 인간의 ‘죽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고종명(考終命)이란 말은 목숨을 버리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자가 만든 것이니 동아(東亞)에 영원히 화를 입힌 것이다.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은 칼로 죽어도 되고 형을 받고 옥사하여도 된다. 어찌 목숨 버리는 것을 생각하여 신음하고 그 혼백이 씨가 되고 7척의 나무를 배회케 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면서 정명(正明)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쾌히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구차히 살아서 모욕당하면서 화랑의 의용(義勇)ㆍ충결한 조의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고려 말엽 주자학이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명철보신의 교훈이 새겨져서 어려움에 임하는 자는 구차히 모면하는 것을 옳은 생각으로 여기고 죽는 것은 성현의 도리가 아니고 도학(道學)의 질서를 거짓으로 만든다고 생각해 전력을 다해 처자를 보존하는 것을 좋은 방법으로 여겨서 ‘고종명’ 3자가 구비되어 그것을 품계를 정하여 권장하였던 것이다. (주석 4)
주석
3> 김동주 편역, <남아가 한번 눈물을 훔친 뜻은>, 83쪽, 전통문화연구회,1997.
4> <단재 신채호전집> 제5권, 358~359쪽, 독립기념관, 2008.
광주학살의 주범과 정범(正犯), 대통령 선거에서 수천억을 주고 받고, 외환위기(IMF)를 불러온 자들이 건재한 나라에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전임 대통령이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곤경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온갖 수모를 견디다 못해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면면한 한국현대사의 모순 구조가 다시 작동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가해진 정치보복의 양상은 야만의 극치였다. 행위 자체는 ‘야만의 극치’였지만, 본질은 어디까지나 한국사회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모순의 ‘구조’에 있었다. 김대중ㆍ노무현에 이은 또 다른 민주진보 정권의 탄생은 잃어버릴 것이 많은 그들에게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노무현의 건재와 봉하마을의 현상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치명적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거기에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상실감과 원한도 깊었을 것이다. 노무현이 건재하고 하루 수천명씩 봉하마을에 찾아가 ‘서민대통령’과 소통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2008년 여름의 ‘촛불항쟁’의 진원지를 엉뚱하게 봉하쪽을 지목하던 터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5월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노 전 대통령이 투신했다고 알려진 봉화산 부엉이 바위가 사저 뒤로 보이고 있다. ⓒ 유성호
2008년 5월 22일 저녁, 노무현에게는 이승에서 마지막이 되는 날의 밤이다.
만감이 교차하고 삶에 대한 욕구와 가족ㆍ친지ㆍ동지ㆍ국민에 대한 사랑과 미련이 교차되었다.
세익스피어는 <햄릿>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 속으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바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어 반대함으로써 이를 근절시키는 것이?
죽는 자는 잠자는 것
그 뿐이다. 만일 잠으로써 우리의 육체가 상속받은 마음의 고통과
수 천가지 피치 못할 충격을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열렬히
원한 극치,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 아마 꿈꾸겠지.
이날 밤 노무현의 심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조선조 인조 5년(1627), 후금(後金)이 침입한 정묘호란으로 나라가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
뒷날 북벌이 추진될 때 최효일(崔孝一)은 기개 높은 선비였다. 그는 북벌군이 진공할 때 현지에서 봉기하고자 청국의 수도 심양으로 잠입할 것을 지원하였다. 최효일은 출발을 앞둔 밤에 시 한 수를 지었다.
萬古爲長夜
何時日月明
男兒一掬淚
不獨爲金行
만고에 기나 긴 밤인데
어느 때에나 해와 달이 밝을 것인가
남아가 한번 눈물을 훔친 뜻은
금일의 행차를 위함만은 아닐세. (주석 3)
이날 밤 노무현의 심사(心事)가 이렇지 않았을까.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면서 최후의 눈물을 훔치며 짧은, 그러나 깊은 의미가 담긴 유서를 쓰지 않았을까. 아니면 대통령 후보경선의 밤과 대선 개표날 저녁에도 태연하게 잠을 잤다는 걸로 봐서 이 밤도 그냥 푹 잤을지 모른다. 아니면 죽음의 공포와 삶의 허망함이 오버랩되어 한동안 망설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운명’을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게 ‘운명’은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의 집합이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밝힌 노 전 대통령 유서 내용 보도자료. ⓒ 윤성효
삼한갑족의 후예로서 형제들의 모든 재산을 털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생애를 조국독립에 바친 우당 이회영이 평생의 지기이며 열렬한 독립운동가인 보재 이상설의 비보를 듣고 “운(運)이여, 명(命)이여.” 하며 긴 밤을 지새웠듯이, 이날 밤 노무현도 자신에게 닥친 운명 앞에 이러지 않았을까.
그는 운명을 ‘체념’(諦念)하고 있었다.
“도리를 깨닫는 마음”의 체념 말이다. 그에게 운명은 ‘자연의 한 조각’으로 표현되는 생과 사의 그네뛰기 방식을 넘어선다. 항상 정직한 그러나 힘겨운 길, 원칙과 소신의 가시밭길을 택했던 그에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명예였다. 그리고 자존이었다. 명예와 자존은 노무현이 지키고자 했던 최후의 마지노선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운명이라 믿었고 체념의 길에 들어섰다.
단재 신채호는 중국 망명지에서 거의 혼자 힘으로 발행한 잡지 <천고(天鼓)> 제3집에서 새로 부임해오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강우규 선생을 애도하며>라는 글에서 사건의 전말을 대략 기록하고, 인간의 ‘죽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고종명(考終命)이란 말은 목숨을 버리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자가 만든 것이니 동아(東亞)에 영원히 화를 입힌 것이다.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은 칼로 죽어도 되고 형을 받고 옥사하여도 된다. 어찌 목숨 버리는 것을 생각하여 신음하고 그 혼백이 씨가 되고 7척의 나무를 배회케 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면서 정명(正明)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쾌히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구차히 살아서 모욕당하면서 화랑의 의용(義勇)ㆍ충결한 조의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고려 말엽 주자학이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명철보신의 교훈이 새겨져서 어려움에 임하는 자는 구차히 모면하는 것을 옳은 생각으로 여기고 죽는 것은 성현의 도리가 아니고 도학(道學)의 질서를 거짓으로 만든다고 생각해 전력을 다해 처자를 보존하는 것을 좋은 방법으로 여겨서 ‘고종명’ 3자가 구비되어 그것을 품계를 정하여 권장하였던 것이다. (주석 4)
주석
3> 김동주 편역, <남아가 한번 눈물을 훔친 뜻은>, 83쪽, 전통문화연구회,1997.
4> <단재 신채호전집> 제5권, 358~359쪽, 독립기념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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