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시인 고은이 내다본 ‘진실 때문에’
노무현 평전/[1장] <노무현 평전> 서설 2011/09/06 08:00 김삼웅
다시 심리학자의 분석을 들어보자.
한동안 신문을 비롯한 각종 매체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마지막 승부수’라고 주장하는 기사들을 버젓이 내보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인간 노무현을 이런 식으로 왜곡하는 분석이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예감에 몸소리를 쳤다.
“안 된다. 그런 엉터리 심리분석은 노무현을 두번 죽이는 행위가 아닌가. 막아야 한다.” (주석 8)
노무현의 생애와 글, 연설문을 치밀하게 분석한 심리학자 김태형은 “노무현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인간승리의 표본이며, 심리적으로 매우 건강한 인물” (주석 9)이라고 주장한다. 보수언론의 ‘마지막 승부수’라는 지적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보수언론이 방향을 돌리기 위해 강조한 ‘마지막 승부’를 위해 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노무현의 죽음과 죽임은 한국 현대사에 쉽게 아물기 어려운 상처가 될 것이다.
그의 죽임의 배경, 죽음의 의미 그리고 피맺힌 유산은 향후 한국정치사의 작용과 반작용, 역학과 동력의 거대한 용암으로 분출되기에 충분하다.
서거 당시 500만명의 추모 물결과 2주기에 모인 거대한 인파, 평소 생가와 묘소를 찾는 그치지 않는 민중의 발걸음은 현재와 미래 한국 정치사의 동력이 되고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역사는 쓰레기 집하장이 아니다. 위대함과 사악함, 친민(親民)과 역민(逆民)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원통한 죽음, 억울한 죽임은 반드시 가려낸다. 그 힘이 역사의 운행을 바꾸기도 한다. 옛적에는 힘으로 억누르고 조작하고 은폐가 가능했으나 이제는 그런 것들이 완벽하게 가능하지 못한 세상이 되었다.
예로부터 원통한 죽음과 억울한 죽임은 반드시 피값을 했다. 명성황후 암살은 의병봉기, 고종황제 독살은 3ㆍ1운동, 순종 서거는 6ㆍ10만세운동, 김구 암살은 6ㆍ25 동족상쟁, 조봉암ㆍ김주열 죽임은 4ㆍ19혁명, 인혁당ㆍ장준하 죽임은 10·26사태, 광주학살과 박종철ㆍ이한열 죽임은 6월항쟁으로 나타났다. 작위적이라 할 지 모르지만 억울한 죽음과 죽임을 역사는 결코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철칙이다.
누군들 죽지 않으랴. 노무현은 생과 사의 선택에서 사(死)가 비루하지 않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어 그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정기가(正氣歌)>를 짓고 오랑캐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자 했던 송나라의 의인 문천상(文天祥)은 적군에 잡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시 한 수를 남겼다. <영정양을 지나면서>의 한 구절이다. 부엉이바위에 선 노무현의 심경이 스쳐간다.
人生自古誰無死
取丹心照汗靑史
예로부터 그 누가 죽지 않을 수 있는가
다만 이 붉은 심장 남겨 역사에 비추리라
눈 밝은 사람은 오래 전부터 인간 노무현을 알아봤다. 시인 고은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노무현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사법고시도 마친 뒤
그는 항상 수줍어하며 가난한 사람 편이었다
그는 항상 쓸쓸하고 어려운 사람 편이었다
슬픔 있는 곳
아픔 있는 곳에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푸우 물 뿜어대며
그러다가 끝내 유신체제에 맞서
부산항 일대
인권의 등대가 되어
그 등대에는
마치 그가 없는 듯이
무간수 등대가 되었다
힘찬 불빛으로
어디 그뿐이던가
사람들 삐까번쩍 광(光) 내는 데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헛소리마저 판치는
텐트 밑에서
술기운 따위 없는 초승달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진실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속으로 격렬한
진실 때문에. (주석 10)
시인 고은이 1997년 6월에 발행한 <만인보>에 쓴 <노무현>의 전문이다.
아직 그가 정치적으로 ‘잠룡’으로 나타나기 전이다. 시인은 그가 ‘진실’때문에 격렬한 진실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고 내다봤다.
노무현은 정치인이면서도 비정치적인 사람이었다. 정치적이지 않는 정치인이기에 국민은 그를 좋아했다. 백색독재, 군사독재의 ‘정치’에 진절머리를 겪어온 국민들은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소탈하고 정직한 노무현을 좋아했다. 그래서 헌정수립 이래 최다 득표를 하게 되고, 재임 중에 이런 저런 구설도 많고 실책도 적지 않았으나, 퇴임하던 날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손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다닌 그를 좋아했다. 그것이 민초들에게 보기 좋았고 노무현의 소탈한 탈권위의 모습이 정겨웠다.
그의 돌연한 죽음에 비보를 접하고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통한이 침묵하던 민초들을 움직이고, 겪어보고 비교해 보니 그립고 안타까워 ‘노무현신드롬’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만해 한용운이 3ㆍ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나와 <철창 철학>이란 연재의 강연에서 “개성 송악산에 흐르는 물은 선죽교의 피를 못 씻고,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이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 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못씼는다”라고 했듯이,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 밑에 뿌려진 노무현의 피는 자연의 풍우에는 씻길 지 몰라도 이 땅의 민초들의 가슴에서는 영원히 씻기지 않을 것이다.
성격적으로 감성적이고 신념과 의리를 소중하게 여겼던 노무현은 자신이나 가족의 어려움 보다 자신에 의해 받게 될 여러 사람들의 고통에 더욱 고통스러워 하였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짧은 유서에서 이렇게 써야할 만큼 그는 고통스러웠다.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오연호는 노무현과 생전에 가진 인터뷰를 정리한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적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 노무현은 자신이 받는 고통보다 자신에 의해 받게 될 여러 사람의 고통을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자유인이 되지 못했다. 정치인이었다. 마지막까지 승부사였다.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과 보수언론에게 온몸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이제 그만, 나로 끝내라”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고시공부하면서 꿈을 키웠던 토굴 근처에 있는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45미터 낭떠러지 아래로.
역사 속으로. (주석 11)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 추도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고 초안에 썼으나 정부측의 반대로 끝내 추모사를 하지 못하였다.
주석
8> 김태형, 앞의 책, 8쪽.
9> 앞의 책, 10쪽.
10> 고은, <만인보> 13권, 30~31쪽, 창작과 비평사, 1997.
11> 오연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47쪽, 오마이뉴스, 2009.
한동안 신문을 비롯한 각종 매체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마지막 승부수’라고 주장하는 기사들을 버젓이 내보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인간 노무현을 이런 식으로 왜곡하는 분석이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예감에 몸소리를 쳤다.
“안 된다. 그런 엉터리 심리분석은 노무현을 두번 죽이는 행위가 아닌가. 막아야 한다.” (주석 8)
노무현의 생애와 글, 연설문을 치밀하게 분석한 심리학자 김태형은 “노무현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인간승리의 표본이며, 심리적으로 매우 건강한 인물” (주석 9)이라고 주장한다. 보수언론의 ‘마지막 승부수’라는 지적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보수언론이 방향을 돌리기 위해 강조한 ‘마지막 승부’를 위해 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노무현의 죽음과 죽임은 한국 현대사에 쉽게 아물기 어려운 상처가 될 것이다.
그의 죽임의 배경, 죽음의 의미 그리고 피맺힌 유산은 향후 한국정치사의 작용과 반작용, 역학과 동력의 거대한 용암으로 분출되기에 충분하다.
서거 당시 500만명의 추모 물결과 2주기에 모인 거대한 인파, 평소 생가와 묘소를 찾는 그치지 않는 민중의 발걸음은 현재와 미래 한국 정치사의 동력이 되고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역사는 쓰레기 집하장이 아니다. 위대함과 사악함, 친민(親民)과 역민(逆民)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원통한 죽음, 억울한 죽임은 반드시 가려낸다. 그 힘이 역사의 운행을 바꾸기도 한다. 옛적에는 힘으로 억누르고 조작하고 은폐가 가능했으나 이제는 그런 것들이 완벽하게 가능하지 못한 세상이 되었다.
예로부터 원통한 죽음과 억울한 죽임은 반드시 피값을 했다. 명성황후 암살은 의병봉기, 고종황제 독살은 3ㆍ1운동, 순종 서거는 6ㆍ10만세운동, 김구 암살은 6ㆍ25 동족상쟁, 조봉암ㆍ김주열 죽임은 4ㆍ19혁명, 인혁당ㆍ장준하 죽임은 10·26사태, 광주학살과 박종철ㆍ이한열 죽임은 6월항쟁으로 나타났다. 작위적이라 할 지 모르지만 억울한 죽음과 죽임을 역사는 결코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철칙이다.
누군들 죽지 않으랴. 노무현은 생과 사의 선택에서 사(死)가 비루하지 않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어 그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정기가(正氣歌)>를 짓고 오랑캐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자 했던 송나라의 의인 문천상(文天祥)은 적군에 잡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시 한 수를 남겼다. <영정양을 지나면서>의 한 구절이다. 부엉이바위에 선 노무현의 심경이 스쳐간다.
人生自古誰無死
取丹心照汗靑史
예로부터 그 누가 죽지 않을 수 있는가
다만 이 붉은 심장 남겨 역사에 비추리라
눈 밝은 사람은 오래 전부터 인간 노무현을 알아봤다. 시인 고은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노무현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사법고시도 마친 뒤
그는 항상 수줍어하며 가난한 사람 편이었다
그는 항상 쓸쓸하고 어려운 사람 편이었다
슬픔 있는 곳
아픔 있는 곳에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푸우 물 뿜어대며
그러다가 끝내 유신체제에 맞서
부산항 일대
인권의 등대가 되어
그 등대에는
마치 그가 없는 듯이
무간수 등대가 되었다
힘찬 불빛으로
어디 그뿐이던가
사람들 삐까번쩍 광(光) 내는 데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헛소리마저 판치는
텐트 밑에서
술기운 따위 없는 초승달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진실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속으로 격렬한
진실 때문에. (주석 10)
시인 고은이 1997년 6월에 발행한 <만인보>에 쓴 <노무현>의 전문이다.
아직 그가 정치적으로 ‘잠룡’으로 나타나기 전이다. 시인은 그가 ‘진실’때문에 격렬한 진실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고 내다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4월 13일 자전거에 두 꼬마를 태우고 산책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 노무현 공식 홈페이지
그의 돌연한 죽음에 비보를 접하고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통한이 침묵하던 민초들을 움직이고, 겪어보고 비교해 보니 그립고 안타까워 ‘노무현신드롬’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만해 한용운이 3ㆍ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나와 <철창 철학>이란 연재의 강연에서 “개성 송악산에 흐르는 물은 선죽교의 피를 못 씻고,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이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 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못씼는다”라고 했듯이,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 밑에 뿌려진 노무현의 피는 자연의 풍우에는 씻길 지 몰라도 이 땅의 민초들의 가슴에서는 영원히 씻기지 않을 것이다.
성격적으로 감성적이고 신념과 의리를 소중하게 여겼던 노무현은 자신이나 가족의 어려움 보다 자신에 의해 받게 될 여러 사람들의 고통에 더욱 고통스러워 하였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짧은 유서에서 이렇게 써야할 만큼 그는 고통스러웠다.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오연호는 노무현과 생전에 가진 인터뷰를 정리한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적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 노무현은 자신이 받는 고통보다 자신에 의해 받게 될 여러 사람의 고통을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자유인이 되지 못했다. 정치인이었다. 마지막까지 승부사였다.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과 보수언론에게 온몸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이제 그만, 나로 끝내라”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고시공부하면서 꿈을 키웠던 토굴 근처에 있는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45미터 낭떠러지 아래로.
역사 속으로. (주석 11)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 추도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고 초안에 썼으나 정부측의 반대로 끝내 추모사를 하지 못하였다.
주석
8> 김태형, 앞의 책, 8쪽.
9> 앞의 책, 10쪽.
10> 고은, <만인보> 13권, 30~31쪽, 창작과 비평사, 1997.
11> 오연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47쪽, 오마이뉴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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